-
김좌진 (金佐鎭, 1889~1930)
김좌진은 홍성의 호명학교(湖明學校) 설립에 참여하면서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을 전후해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고, 신의주에는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김좌진은 일제강점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고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 하지만 일제경찰에 발각되어 1911년 5월 2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김좌진은 광복회에 참여했다. 광복회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김좌진은 1919년 2월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김약연(金躍淵) 등 국외 독립동가 39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발표에 참여해 일본을 응징하고, 독립군과 한민족 전체의 총궐기를 촉구했다. 김좌진은 같은 해 3월 이후 대한독립의군부 후신으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했으며, 서일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정의단에 합류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기관에 소속되었고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했다. 대한군정서에서 김좌진은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군사부문을 전담했다. 또한 김좌진은 1920년 2월 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교장을 맡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여 대한군정서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김좌진은 1920년 10월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대첩은 일제 식민지배로 신음하고 있던 우리민족에게 전쟁을 통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대표적인 전투였다.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 이후 북만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단에서도 총사령관을 맡아 무력투쟁을 전개했으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에 많은 주력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5년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김좌진은 1925년 3월에 신민부원을 파견해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했으며, 특수공작 대를 국내에 파견해 국내의 작전지도 등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김좌진은 1928년에 12월에는 혁신의회를 결성하여 민족유일당 운동을 벌였고, 다음해 7월에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북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
유관순 (柳寬順, 1902~1920)
19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이었고 4월 학기제였던 당시 한 달 후에는 2학년이 될 예정이었다. 유관순은 공주 감리교회의 제이 햄몬드 샤프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교비생(장학생)으로 기숙사생활을 하며 학업을 하고 있었다. 사촌언니 유예도도 샤프여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서 함께 수학하였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작된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치며 정동 덕수궁 뒤편에 있는 이화학당의 교문 앞에 왔다. 시위대는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프라이 교장은 교문을 막고 서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았다. 힉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은 항의했고,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내 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 주도하에 수만의 학생, 시민들의 제2차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다. 유관순은 이때에도 참여했다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다행히 이화학당 당국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날 수 있었다. 3월 12일 상급 과정의 선배가 유예도 등 10여 명의 지방학생을 불러모아 지방으로 급히 내려가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주었다. 3월 13일 유관순과 유예도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함께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자금 모금을 하고자 하였다.
부형들이 “우리도 차라리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하였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음력으로 3월 1일이 되는 4월 1일 병천(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유관순은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중간에 유관순은 시위에 쓸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왔다. 3월 31일 밤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천안, 청주, 진천 방면의 산에 횃불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각지 마을의 산봉우리에서 이에 호응하여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 각지에서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유관순은 남색 치마에 빨강 저고리를 입고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시위과정에서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하여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관순도 몸을 숨기라는 같은 마을 이모의 강력한 권고를 듣고 박종환 집에 몸을 피했다. 유관순이 그 집에서 2~3일 몸을 숨기고 있다가 동생을 만나기 위해 갔다가 돌아나오는 길에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유관순은 3년형으로 확정되었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서도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했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자 유관순은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였다. 이때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아우내만세운동 때 입은 상처와 그간의 갖은 고문에다 방광파열이 겹친 유관순에게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하였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
윤봉길 (尹奉吉, 1908~1932)
윤봉길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였다. 14세인 1921년 집 근처에 있는 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서 경서를 비롯한 한학을 수학하였다. 윤봉길은 오치서숙에서 수학하던 중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계기로 한 사람의 무지는 무덤을 잃게 하지만, 민족의 무지는 나라를 잃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할 때부터《동아일보》와《개벽》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민족문제와 농촌 문제를 탐구하였다. 오치서숙을 수료한 직후인 1926년 문맹퇴치를 위하여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당을 개설하였다. 그는 문맹자들을 모아 가르쳤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야학운동을 하면서 교재로『농민독본』(전 3권) 을 저술하였다.
윤봉길은 1927년 3월에는 목계농민회를 조직하고 농민의 경제 자립을 위한 부흥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목계농민회의 농민운동은 우리나라 근대 농업협동조합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29년 4월 부흥원에서 월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 시기 그는 농민운동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였고, 결국 1930년 3월 6일 결국 상해로 떠나 한인공우친목회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김구에게 이봉창의 동경 의거와 같은 일을 맡겨 달라고 부탁하였다. 김구는 윤봉길의 독립운동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고 일본군의 천장절 행사에서의 계획을 전달하였다. 이후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4월 29일의 의거를 감행할 뜻을 밝혔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입고 일본 보자기에 싼 도시락과 수통을 메고 손에는 일장기를 들고 홍구공원에 입장하였다. 오전 9시 30분부터 개시된 관병식이 끝나고 축하식이 끝나고 기미가요 합창이 한창일 때 윤봉길은 단상의 일본 수뇌부를 향해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은 다시 도시락형 폭탄을 던지려 하였으나 육전대지휘관 호위병 고모토[後本武彦] 일등병조에 의해 제압되고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헌병대로 끌려갔다.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당일 오후 1시경에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일제의 만보산 사건 조작으로 야기된 한중 양 민족의 반감을 회복, 강화하여 중국지역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다시 가능하게 하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1932년 5월 25일 일본군 상해파견군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유해는 1946년 김구의 지시에 의해 반장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
임병직 (林炳稷, 1893~1976)
임병직은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알선으로 도미(渡美), 오하이오대학에 재학 중『한국학생평론(韓國學生評論)』을 창간하고 그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일제의 한국 강 점을 비판하고 미주지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이승만·서재필(徐載弼) 등은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다. 임병직은 이 대회의 서기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 방략을 토의하였다. 이후 이승만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자 그의 비서로서 미국과 구미지역의 외교활동을 담당하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 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구성되자, 그는 김호(金乎)·한시대(韓始大)·김병 연(金炳淵)·송철(宋喆) 등과 집행부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 회에는 외교를 담당할 주미외교위원부를 두고 그 책임자로 이승만을, 한길수를 국방 공작봉사원에 임명하여 외교활동을 뒷받침하게 하였다. 1941년 6월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때 임병직은 이승만을 도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 획득과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자유한인대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든 정성을 다하여 지원하고 유지해 나갈 것,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미국무부에 요청할 것,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국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 등을 결의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임병직은 이승만과 더불어 미국과 미의회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힘을 쏟았다. 임병직은 이승만을 보좌하여 대미 외교활동을 펼치면서도 1942년 2월에는 샌프란시 스코에서 한인국방경위대에 참여하여 선전과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1942년 6월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소식을 전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임병직은 이 방송원고를 작성하여 한국민들은 일본군에 협조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방송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45년 4월 25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연합국가들이 전후 세계평화와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연합국회의가 개최되었다. 재미한인들과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고, 이승만은 그해 2월 23일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출석할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는데, 임병직도 이승만과 더불어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외무부장관에 기용되었으며, 1951년 주유엔대사가 되어 외교활동을 담당하였다. -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한용운은 아버지에게 배운 교시, 국가 멸망의 위기의식, 고향에서 전개된 의병전쟁 등에 자극을 받아 18세이던 1896년 고향을 떠나 상경 길에 올랐다. 도중에 인생에 대해 번민하고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민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고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해 있던 불교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백담사를 찾아 불가에 입문하였다. 1905년 백담사에서 수계, 득도한 그는 건봉사, 유점사 등지에서 계속 불경을 공부하였고, 1909년 경부터는 각지를 순회하며 불교혁신과 대중화운동 에 진력하였다. 만해는 불교계의 병리적 현상들을 유신하고 대중화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인식하였다. 1910년에 탈고하여 1913년에 발간한『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그의 불교 개혁 의지와 방향이 종합된 실천적 지침서이다. 1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당시 조선 불교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자유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민족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초기 계획 단계를 주도한 것이었다. 1919년 1월 말경, 만해는 천도교가 주도하는 3·1운동의 초기 단계에 합류하였다. 3·1운동의 초기 계획단계에서 그는 유림과 불교계의 연합을 담당하였는데, 기독교측 대표 16명, 천도교측 대표 15명과 함께 불교계 2명이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이른바 민족대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사 하루 전날인 28일 밤에는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 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회합하여 다음날의 결의를 다졌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파고다 공원에 군중이 운집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불상사를 우려하여 독립선언 장소를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일경에 체포되더라도 행동을 함께 하며 정정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것을 결의하는 등 행동지침을 통일하였다. 만해는 독립선언서의 불교계 배포도 담당하였다. 독립 선언 직후 만해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연행되었는데, 일본 경찰과 검사, 판사들의 거듭되는 심문에 당당한 기개와 정연한 독립논리로 그들에게 대항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부 겁약한 민족대표들의 행동을 질타하기도 하는 등 도승다운 자세로 옥고를 치뤘다.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한 만해는 불교혁신운동, 신간회운동, 교육진흥운동, 여성해방운동, 농민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조선불교청년회 등 여러 불교 단체를 주도하는 한편,『불교』의 간행을 통해 불교 교리를 민중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그가 주도한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강령과 활동은 그의 불교운동이 곧 민족운동과 합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1926년에 발표한『님의 침묵』은 그를 우리나라 문학사에 있어서 최초의 근대시인, 최대의 시민문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