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고려시대

  • 박술희의 모습

    박술희 (朴述熙, ?~945)

    박술희는 고려 건국 공신이다. 18세에 궁예의 호위병이 되었고, 이후 태조를 섬기며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대광(大匡)에 올랐다. 태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921년 태조의 뜻을 받들어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소생인 맏아들 무(武, 혜종)를 태자로 세운 일과, 936년 태조의 명을 받아 태자 무와 함께 후백제 신검(神劍)을 공격한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혜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후일 혜종 묘정에 유일하게 배향되었다.

    박술희는 936년 6월 태조의 명을 받아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후백제 신검을 공격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다. 943년 태조가 임종할 때는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그러나 태조 사후 광주 지방의 강력한 호족출신이자 외척세력인 왕규(王規)와 적대관계에 놓여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신변을 의탁한 탓에 정종(定宗)의 의심을 사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후일 엄의(嚴毅) 시호를 받고,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 복지겸의 모습

    복지겸 (卜智謙, 미상)

    복지겸은 고려 건국 공신이다. 본래 태봉(奉封) 지역의 마군장군(馬軍將軍)이었으나, 궁예(弓裔)가 횡포를 부려 민심을 잃게 되자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과 함께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고려를 개창하였다. 이 공로로 918년 태조(太祖) 즉위 당시 개국공신 1등에 녹훈(祿勳)되었다. 복지겸은 개국 이후에도 반란세력을 진압해 고려 초기 태조가 혼란한 정국 속에서 국가의 기틀을 안정적으로 닦아나가는 데 기여하였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을 잡아내고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를 평정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공로로 994(성종 13)년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또한 그의 은공은 후손에게도 미쳐 975년(경종 원년)에 훈전(勳田)이 지급되었다. 나아가 1052년(문종 6) 벼슬이 없는 후손에게는 초직(初職)이 부여되고, 벼슬이 있는 후손의 경우에는 품계가 상향되었다.

  • 탄문의 모습

    탄문 (坦文, 900~975)

    탄문은 고려 광종대의 국사(國師)이다. 5세 때 출가하여 장의산사 신엄대덕의 제자가 되었다. 신엄대덕의 제자가 되자마자 『화엄경』을 독송하고, 하루에 1권씩 외워 신엄대덕이 장차 큰 그릇으로 여기며 크게 기뻐하였다. 15세에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태조 때 명성이 천하에 널리 퍼져 별화상(別和尙)에 봉해지고, 921년 승려 선발 시험의 시험관으로 발탁되었다. 926년에는 유왕후가 임신하여 특별한 꿈을 꾸자 태조의 명을 받아 법력을 기원하고 치하받았다. 이후 화엄의 여러 수장들 중 그 덕행(德行)을 인정받아 별대덕(別大德)에 제수되었다. 이때 배움을 청하는 이가 많아 문도가 성행하였다.

    광종대에는 꿈을 통해 수명이 연장되는 신비한 일을 징험하고, 임금의 만수를 축원하며 삼존금상(三尊金像)을 조성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시대가 새로워지고 계획에 빛남이 있었다고 전한다. 968년에는 광종이 대장경법회(大藏經法會)를 열고 편지를 보내 대사를 초청하였는데, 승(僧)과 속(俗)의 사신을 보내 극진하게 맞이하고, 별도로 마납가사와 백마노염주를 하사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광종이 귀법사를 중창하고 대사에게 머물기를 청하며 계금가사와 법의(法衣)를 전송하였다. 태자도 극진하게 예우해 법의와 한명(漢茗), 만향(蠻香) 등을 전송하였다. 또 10월에는 국왕이 대사의 덕망을 높이 숭상하고 자비에 깊이 감응하여 왕사홍도삼중대사(王師弘道三重大師)에 봉하였다. 나아가 972년에는 태자의 축원과 태자궁의 번성을 기원하며 천불도량(千佛道場)에 들어가 분향하였는데, 7일 뒤 꿈에 실제 500명의 승려가 와서 "대사가 바라는 바를 부처께서 들어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에게 화사(畵師)를 청해 오백나한(五百羅漢)을 그리고 안선보국원(安禪報國院)에 봉안하였다. 975년 몸이 쇠약해져 가야산사으로 돌아가길 청하였는데, 광종은 이별을 매우 여기어 거듭 귀법사에 머물 것을 청하였다.

    975년 가야산사에 돌아온 탄문은 제자들에게 의발과 법구(法具)를 전해주고 죽음을 준비하였다. 직접 몸을 씻고 대중에게 “사람에게는 노소가 있지만 법에는 선후가 없다...여래(如來)의 바른 계율을 지키고 힘쓰라”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보원사 법당에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시멸하였다. 광종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글로써 조문하고 국공(國工)에게 명해 사리탑을 쌓았다. 경종대 ‘법인(法印)’이라는 시호를,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추증받았다.

    탄문은 화엄종의 승려였지만, 교종과 선종을 융합하는 포용력을 지녔다. 이는 그가 만년에 가야산사로 돌아올 때 교종과 선종의 승려 1,000여 인이 그를 맞이한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교선통합을 지향한 탄문의 사상적 경향은 당시 정국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강민첨의 모습

    강민첨 (姜民瞻, ?~1021)

    강민첨은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서경(평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애수(隘守) 진장(鎭將)으로서 대책을 마련하여 서경을 수호하였다. 낭중(郎中), 홍협(洪叶), 방휴(方休) 등과 의논해 통군 록사(統軍 錄事) 조원(趙元)을 병마사(兵馬使)에 추대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서경을 지켰다. 1012년에는 안찰사(按察使)로서 도부서(都部署)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해 영일(迎日)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다. 1016년 내사 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1018년 거란이 8년 만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대장군 평장사)의 부장(副將)으로서 출전하여 격파하였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데 영주(寧州)에 주력을 주둔시키고, 주변 지형을 활용해 기병 1만 2천 명을 산에 매복, 성의 동쪽 대천(大川)을 막아 방어하였다. 이때 거란의 수장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진격하는 것을 끝까지 추격해 자산(慈山)에서 격파하였다. 이듬해 2월 거란이 구주(龜州)를 통과할 때는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 부대와 합세해 맹렬히 교전하여 살아 돌아간 적병이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민첨은 이 공으로 응양상장군주국우산기상시(鷹揚上將軍柱國右散騎常侍) 및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올랐으며, 1020년에 지중추사(知中樞事)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 1021년 11월 생을 마감하였으나, 왕은 그의 공을 기려 아들 단에게 녹자를 하사하고 태자태부에 추증하였으며 초상화를 제작하여 공신각에 봉안하였다.

  • 한문준의 모습

    한문준 (韓文俊, ?~1190)

    한문준은 고려 중기 명종대의 문신이다. 인종 대 과거에 급제하여 장주(長州), 장흥(長興), 남원(南原) 세 고을의 부사를 역임하고 남경유수(南京留守)가 되었다. 오직 민생을 위하는 정사를 편 까닭에 그의 제자, 오세재(吳世材)는 시를 지어 “남녘에서는 세 군의 풍속을 바로 잡았고, 동쪽에서는 한 고을 백성을 애무하였다”고 칭송하였다. 한문준은 인사를 매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또한 사람을 잘 알아보는 통찰력이 뛰어났다. 이에 1176년(명종대)에 이문탁(李文鐸)과 함께 지공거로 임명되어 진사를 선발하였다. 이후 추밀원 우승선(樞密院 右承宣)을 거쳐 추밀원 부사(副使)에 올랐다.

    그러나 1179년 당시 집권자 정중부(鄭仲夫)의 사위인 송유인(宋有仁)의 미움을 사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 강등되었다. 당시 그는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한 병사의 관직을 구하기 위해 송유인에게 편지를 보내고 집을 방문해 “사사로운 일로서 집정 대관의 집을 찾아다닌다”는 혐의를 받아 탄핵되었다. 한문준이 탄핵될 때 왕은 매우 곤란해 하였으나 한문준은 자청하여 지금 만약 송유인의 “청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반드시 예측하지 못할 환란이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그 요구를 들어주소서” 청하였다. 이후 다시 벼슬에 올라 1180년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태자소보(太子 少保)가 되었다.

    1180년 정월 무인 집정자들에 의해 인사가 어지러워지자 방책을 세우고 상소를 올려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보문각 태학사 판예부사(寶文閣 大學士 判禮部事)에 올랐다. 1181년에는 정당문학 판병부사(政堂文學 判兵部事)로 있으면서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지공거로 임명돼 진사를 선발하였다. 이후 1183년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 平章事 判吏部事)로 승직되었다. 1182년 성변(星變)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나이 70에 이르러서야 낙향해 은사(隱士) 또는 시객(詩客)들과 어울려 시와 술로써 여생을 보냈다.

  • 망이, 망소이의 모습

    망이 · 망소이 (亡伊 · 亡所伊, ?~1177)

    망이·망소이 난(1176년)은 고려 무신집권 초기 무신들의 권력 다툼이 발생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며 일어났다. 망이·망소이(亡伊·亡所伊, ?~1177)는 고려시대 천민집단의 특수행정 구역인 소(所)의 과도한 부역과 차별에 항거해 공주 명학소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스스로를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고 부르고 본읍 공주를 습격해 함락시켰다. 당시 조정은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郎將) 박강수(朴剛壽) 등을 파견해 회유하고,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3,000명의 군사를 내주어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회유와 토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망이·망소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내원 승(內園 丞) 양수택(梁守鐸)을 현령(縣令)으로, 내시 김윤실(金允實)을 현위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장군 박순(朴純)과 형부 낭중(刑部 郎中) 박인택(朴仁澤)을 보내 타일렀다. 그러나 망이망소이는 끝내 응하지 않고 예산(禮山)을 공략해 감무(監務)를 살해하였다. 망이·망소이난은 12월 조정이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처치병마사(處置兵馬使)로 임명해 토벌하며 이듬해(1177년) 1월에 진압되었으며, 조정이 곡식을 내어주고 감찰어사(監察御使) 김덕강(金德剛)을 시켜 고향으로 호송하는 등 회유책을 펴며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1178) 2월 조정이 소를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두어 안무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토벌하자 다시 난을 일으켰다. 2월에 서산(瑞山) 가야사(伽倻寺)를 점거하고 3월에 직산(稷山)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워 승려 10여 인을 살해, 주지를 핍박하였다. 이어 4월에는 아산(牙山)을 공격해 점령하였으며 청주목(淸州牧) 치소(治所)를 제외한 관할구역 내 모든 군현(郡縣)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월 서경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조정이 병력을 집중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며 진압되었다.

    망이·망소이난은 천민집단의 특수행정구역인 소에서 일어났지만, 저항이 확대되어 신분 해방을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실제 천민집단의 소멸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소의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없애는 데서 시작해 정권 탈취를 도모하는 데까지 나아간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 정인경의 모습

    정인경 (鄭仁卿, 1237~1305)

    정인경은 원 간섭기 고려와 원을 오가며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해 원 황실과 고려 왕실의 신임을 받은 문신이다. 그는 생전에 세 차례나 신년 축하 사절로서 원에 파견되고, 황제 생일 축하연에 특별히 초대되었다. 또한 1299년에는 원 인후(印侯)가 무고해 고려를 핍박하자 가서 해명하고, 황제에게 직접 표문을 전달하였다.

    1256년 원이 서울(개경)에 난입하였을 때 16세의 나이로 종군하여 대정(隊正)에 임명되고 공을 세워 제교(諸校)에 올랐다. 1259년에는 어사대(御史臺) 사록(司錄)에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판교위(判校尉)가 되었다. 1269년 충렬왕을 수행하고 원에 건너갔을 때 임연(林衍)이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에게 청해 황제에게 보고하여 토벌할 것을 권하였다. 이 공으로 1274년 시종1등공신(侍從一等功臣)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원에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자 대신들의 의심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278년 장군 겸 전법총랑(將軍兼典法摠郞)에 임명돼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며, 1280년 군부판서 춘궁익위 판전(軍簿判書 春宮翊衛判典)으로 승진해 노비 200인과 토지 20결(結)을 하사받았다. 1282년에는 왕명을 받고 요동(심양)에 나아가 고려 유랑민과 피난민을 조사하고 데리고 와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또 이듬해에 다시 왕명을 수행해 사순위좌우위대호군(司巡衛左右衛大護軍) 정헌대부(正獻大夫) 군부판서(軍簿判書) 춘궁익위(春宮翊衛) 판전목사(判典牧使) 세자원빈(世子元賓) 책안사공신(策安社功臣) 도형벽상(圖形壁上) 사록권(賜錄券) 밀직사사(密直司事)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 광정대부(匡靖大夫) 판삼사상장군(判三司上將軍)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우상시중군사(右常侍中軍使)로 책봉되었다. 1288년에는 세자원빈(世子元賓)이 되고, 1289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0년 충렬왕이 동녕부(東寧府)를 폐지하고 그 땅을 우리나라에 돌려줄 것을 요청할 때 황제에게 일을 잘 진달해 승인을 받았으며, 이 공로로 왕의 특명을 받아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 광정대부판삼사상장군지도첨의찬성사(光靖大夫判三司上將軍知都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292년 금혼령(禁婚令)을 위배해 해도(海島)로 유배되고 1294년 스스로 사직하였다. 이후 1299년 왕이 관직을 하사해 다시 벼슬에 나아갔는데, 당시 네 차례나 승진을 거듭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원 도당(都堂)에 나아가 들은 내용을 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대신들의 심기를 건드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 백이정의 모습

    백이정 (白頤正, 1247~1323)

    백이정은 고려 후기 유학자이다. 어려서 부친을 따라 개경에 올라가 15세 때 안향(安珦)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127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298년 충선왕을 따라 원에 건너가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이때 그는 학문에 힘써 국가의 장래를 도모하는 일에 전일하며 벼슬을 일체 사양하였다. 그의 청백리한 자질은 「연거시(燕居詩)」에 잘 나타난다.

    백이정은 1308년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충선왕이 환도한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주자가례를 비롯한 정주 성리학 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안향 아래서 같이 동문수학한 권부(權溥), 우탁(禹倬)이 그의 문하에 제자로 나아가 배우고,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이곡(李穀), 이인복(李仁復), 백문보(白文寶) 등 혁혁한 문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백이정은 그 문인들이 후일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말 폐정을 시정하고 도학 및 예학 발전에 이바지한 까닭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이는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고 후학을 길러낸 자는 백이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백이정은 학문 뿐만 아니라, 충선왕 2년에 재신들의 녹봉 지급을 금하라는 왕명을 피할 만큼 왕의 신임을 한껏 받은 충신이었다. 1314년(충숙왕 원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 및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하였으며 이후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319년 고향 남포로 낙향해 학당을 세우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고, 이제현을 통해 다시 이색(李穡)에게, 이색을 통해 다시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전승되었다.

  • 최영의 모습

    최영 (崔瑩, 1316~1388)

    1316년 고려 충숙왕 때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에서 태어나 16세 때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을 교훈 삼아 청렴 결백한 관리였다. 고려의 건국 이상인 옛 고구려 땅 만주 벌판을 되찾는데 노력하였으며 홍건적을 격파하고 1360년 남쪽 지방을 괴롭히는 왜구를 섬멸하고 1375년 홍산대첩(鴻山大捷)등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우왕은 장군에게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 벼슬을 주고 전토와 노비를 상으로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73세(1388) 고령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맡았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우리의 북쪽 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기의 땅이라고 하자, 장군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옛고구려 땅인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고양)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되었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경이 함락되자 이를 무찌르고 수복하였고, 다시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역시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하였다. 홍산대첩에서 왜구를 섬멸한 것을 비롯하여 수십차례에 걸쳐 왜구를 무찌르고 국내의 대소 반란 토벌 등 80여 회나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공민왕 4년에는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횡포와 국내의 혼란으로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았고, 신흥 명나라가 철령이북 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

  • 김종서의 모습
    [김종서]([金宗瑞][절재(節齋)])

    김종서 (金宗瑞, 절재(節齋), 1383~1453)

    김종서는 고려 말 1383년 충남 공주에서 김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것은 세종이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여러 벼슬을 맡았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입이 잦자, 김종서는 1433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방을 개척했다. 이후 7년 동안 회령, 경흥, 종성, 온성, 경원, 부령에 육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를 맡아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여 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그 후 세종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김종서는 형조 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1449년~1452년에 걸쳐 고려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는 작업을 하였다. 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단종이 12세 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그는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황보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충심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1453년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유정변을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 류방택의 모습

    류방택 (柳方澤, 금헌(琴軒), 1320-1402)

    류방택(柳方澤)은 서령(서산)류씨로 1320년(충숙왕7)에 지금의 서산시 인지면 무학로에서 태어나 예조판서 손사(孫俟)의 장녀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두었다. 정이오(鄭以吾)가 쓴 ‘금헌공행장(琴軒公行狀)’에 따르면 그의 자(字)는 태보(兌甫)이고 호(號)는 금헌(琴軒)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역년에 대하여는 1352년(공민왕1)에 산원을 시작으로 서운관주부, 중현대부 사재령, 원윤, 판서운간사를 겸직하고, 검교밀직부사 판서운관사 등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중 판사천감사(判司天鑑事)를 역임했는데 사천감은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오늘날 기상청장과 비슷한 직책이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류방택은 더 이상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나는 고려인이므로 송도에서 죽으니 죽거들랑 내 무덤에 봉분하지 말고 묘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류방택은 1402년(태종 2) 송도의 집에서 별세하였는데 그의 묘소는 경기 철원도호부 임강현 도원에 안장되었다.
    조선 후기, 고향인 서산의 유생들이 송곡사(松谷祠)를 짓고 그를 제향하였으며, 오늘날 서산시에는 금헌 류방택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과 국가표준영정이 있는 ‘금헌 영정각’이 있다.

    류방택은 1393년(태조2)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그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1,467개의 별을 계산하여 1395년(태조4)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별들을 하늘의 십이차 및 분야에 따라 그렸는데 이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하늘로부터 받아 이루어졌다는 명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늘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도이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로 국보 제228호로 지정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1만원권 지폐의 뒷면 밑그림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06년에 100대 민족문화 상징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한국천문연구원에서는 새로 발견한 소행성을 ‘류방택별’로 헌정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산시에서는 류방택별축제와 헌정사업을 개최하고 있다.

담당부서 : 정책기획관
문의전화 : 041-635-2111

* 본 페이지에 대한 저작권은 충청남도가 소유하고 있으며, 게재된 내용 및 운영에 대한 개선사항이 있으시면 정보관리 담당 부서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