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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을 만나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존재한다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정장리 273-2

2024.01.31(수) 09:57:48 | 류두희 (이메일주소:ryu5450@naver.com
               	ryu545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을 만났다. 오늘은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거리에 세워졌지만 평소에 가보지 못했던 한훈 선생 기념관을 찾아봤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가로 광복단 결사대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벌이고 군자금을 모아 전달했던 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한훈 기념관을 들어섰다.

한훈 기념관 전경
▲ 한훈 기념관 전경

계룡대에 근무할 때 한훈 선생의 집터를 수차례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기념관 입구에는 한훈 선생의 집터에 있었다 던 우물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벽면에는 “세우자 우리나라, 우리 손으로‘ 라는 한훈 선생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36년 군대 생활을 했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깊이 공감가는 대목이었다.

독립운동가한훈선생을만나다 1

우물과 글귀
▲ 우물과 글귀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친절하고 인자해 보이는 관광해설사님이 한훈 선생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한훈 선생은 1889년 3월 27일 충남 청양에서 아버지 한성교와 어머니 성자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명은 한우석이며, 가명으로는 ‘만우’, ‘동열’, ‘조선달’ 등을 썼고 호는 송촌(松村)이다. 평소 성품은 침착하고 대범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훈 선생님
▲ 한훈 선생님

해설해 주시는 분
▲ 해설해 주시는 분

한훈 선생의 부인 유응두는 남편인 한훈이 처음 감옥에 갇힌 8년 동안 아들 ‘세택’을 홀로 키우며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때로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며 무기를 나르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하루는 검문하던 일본 경찰이 유응두를 불러 세웠다. 옷 속에 감춘 무기에 찔려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 “월경이 나서 그렇다. 왜 장에 가는 여인을 붙들어 세우느냐”고 호통을 치며 위기를 모면했다. 날마다 남편이 있는 곳을 대라며 일본 경찰이 고문을 가했지만 모질게 참아냈다고 한다.

두분의 동상
▲ 두분의 동상

한훈 선생은 불과 열일곱 남짓의 나이에 의병이 되었다. 형인 한태석과 함께 의병이 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외숙의 영향이 있었다. 한훈과 그의 형 한태석은 이후로도 평생 동안 서로 든든한 독립운동의 동지로서 활동했다.

독립운동가한훈선생을만나다 2

내부 사진
▲ 내부 사진

1907년 계룡 신도안으로 이주하여 을사오적 처단 시도, 대한광복단 입단을 통해 주로 친일 부호 처단,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셨다. 1920년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기회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일본고관을 암살하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 김상옥(金相玉) 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처단하려 하였으나 붙잡혀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복역 도중에 의병 사건이 드러나 형이 가중되어, 19년 6개월의 옥중투쟁을 하게 됩니다. 출옥 이후 대한광복단을 재건해 자주독립국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신도안 추열사에서 순국열사들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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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중투쟁

광복군 결사대
▲ 광복군 결사대

한훈 선생은 어느 날 대전을 지나가다 매약 행상을 하던 김상옥을 만났는데 그가 군중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동지가 되었다고 한다. 김상옥은 의열활동 중 1920년에 상해로 망명했다가 1923년 1월 서울에 잠입,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김상옥은 종로구 효제동 주택가를 누비며 양손에 권총을 든 채로 무려 세 시간이나 일본 군경과 시가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총알이 한발 밖에 남지 않자 그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 순국하였다. 한훈은 해방후 김상옥 의사의 유족을 돕기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등 동지들을 추모하는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별히 한훈과 김상옥은 사돈의 연을 맺기로 굳게 약속하였고 그 뜻에 따라 한훈 선생의 딸 한정수와 김상옥의 아들 김태운이 6.25.전쟁중에 결혼식을 올렸다.

세분의 사진
▲ 세분의 사진

선생은 경성, 광주, 전주, 대전, 신의주 등 여러 형무소로 전감 중 고문학대 끝에 단식투쟁을 하다가 중병에 걸려 1941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셨다. 지금 한훈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신도안 정장리에서 신병을 치료하고 서당을 차렸으며 신도안의 서장환과 안종순 등 애국지사들과 교유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 받으셨다.

기념관 내부모습
▲ 기념관 내부모습

그 옛날 일본에 몸숨걸고 맞서 싸우던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나라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나가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한 하루였다.


한훈기념관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계룡대1로 35
관람료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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