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분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백제의 두번째 도읍으로서 475년~538년까지
백제 웅진 시기를 이끌었던 공주에는 그 시기 백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있는데요. 송산(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과 1~6호분까지 총 7기만
정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근에 웅진백제역사관 및 국립공주박물관과 함께 방문하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역사적 의미를 함께 관람할 수
있습니다.
1. 무령왕릉과 왕릉원 관람 기본 정보입구에 안내 된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관람 정보입니다.
특히 무료 대상 및 감면 대상의
정보가 흥미롭습니다. 공주 역을 이용하여 문화재를 관람하는 사람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모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며 공주시와 상생발전 협력을 맺은 지역의 방문객도 입장료가 감면되니 확인해 보시고 해당되는 혜택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언덕을 올라가다 이 표지판이 보입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들르면 안내판에 적힌 곳들을 모두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맨 위 오른쪽 화살표의
‘왕릉원 모형관’이 바로 전시관으로 이곳부터 관람하시면 됩니다.
2.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실제 발굴된 왕릉은 문화재청의 영구비공개 결정으로 1997년부터 내부관람이 중지되었지만 왕릉 근처 모조전시관을 통해 체험을 해 볼 수 있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백제시대 고분이 총 7기가 모여있는데 전시관에서는 5호분, 6호분 및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을 관람객이 체험해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시관 내부에 들어서면 백제 왕릉에 대해 영상으로 접해 볼 수 있는 영상관이 있습니다.
간단히 영상을 보고 전시를 관람하는 것도 전체적인 문화와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전시관을 방문할 때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을 때와 혼자 관람할 때 각각 다른 매력이 있는데요. 이번 방문에서는 문화해설사님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설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해설을 들으며 관람을 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전시관 시작점에는 송산의 남쪽 경사면의 고분군을 한번에 볼 수 있도록 안내가 되어있습니다. 상부의 1~4호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로 유물 및 봉토가 유실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일제강점기 공주에서 활동한 일본인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가루베
지온’이 독단적으로 국내 고분을 발굴 조사하며 무단으로 문화재를 무단 반출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분개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사진 속 7번인 무령왕릉은 5호분과 6호분 뒤에 붙어 있듯 위치해 도굴의 위험을 피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실제 왕릉 내부는 영구비공개로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전시관 내부에는 사진처럼 왕릉 내부를 실제 사이즈로 다시
만들어 관람객들이 들어가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5호분은 백제 전통적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정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네 벽이 위로 갈수록 좁아져 둥근 천장을 이루는데 둥근
것은 하늘, 곧 왕을 의미하고 네모난 바닥은 땅, 곧 백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좁은 공간에 여러명이 들어가 설명을 들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두번째 모형으로 들어가 봅니다. 무령왕릉 앞에 위치해 있던 6호분의 내부 모형입니다.
6호분은 굴식돌방무덤이 아닌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을 쌓아 터널형으로 만든 벽돌형 무덤이라고
합니다. 도굴로 인해 껴묻거리(부장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벽돌에는 “돈”을 의미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6호분 전시관 옆에는
벽면의 사신도를 영상자료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을 향하고 있는 북쪽 벽의 벽화는 현무도입니다. 서벽은 백호, 동벽은 청룡, 남벽은 주작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전시관*5호분과 6호분을 위한
배수로 공사로 인해 우연히 발굴하게 된 무령왕릉은 당시 도굴되지 않고 보존된 채 발견했던 유일한 왕릉이었다고 합니다. 무령왕릉을 체험하기 위해 가는 길 벽에는 무령왕릉의 발견 과정과 이야기가 안내가 되어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약탈을 당하거나 도굴을 전혀 당하지 않은 밀봉 상태의 왕릉이었으나 몰려드는 구경꾼과 취재진들로 인해
유물이 도난 될 수도 있다는 조급함 때문에 철야 작업을 통해 17시간 만에 발굴을 서둘러 끝내 많은 안타까움을
남겼다고 합니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설명은 무령왕릉이 삼국시대의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었다는 사실입니다.해설사님은 묘지석에 적힌 글자를 설명해 주시며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 사마왕(斯麻王)인데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셨다.”라고 명확히 적혀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른
곳에도 왕과 왕족들의 왕릉이 많이 있지만 이런 묘지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마총”, “금관총”등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로 이름을 붙여 불린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지하신에게 묘지로 쓸 땅을 돈 1만문을
내고 샀다는 뜻의 ‘매지권’이었습니다. 실제로 묘지석 위에서는 돈다발이 놓여져 있었다고 해요. 묘지석은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모형으로 만들어진 무령왕릉 내부는 중국 고대 남조시대 양나라 지배층에서 사용하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 양식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 백제와 양나라 사이에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벽돌에는 극락왕생을 희망하는 연꽃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높이 3.1m, 남북 4.2m, 동서
2.72m의 크기로 남북으로 긴 네모꼴이며 천정은 사진과 같은 아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모형관에서 실물과 같은 고분 모형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발굴된 유물도 4600점 정도가 되며 국보로 지정된 것도 12점이나 된다고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유물
무령왕 - 금제관식, 금귀걸이, 금제 뒤꽃이, 발받침
무령왕비 - 금제관식, 금귀걸이, 금목걸이, 은팔찌, 베개
무령왕릉 - 진묘수 석수, 묘지석
지석, 관 꾸미개
전시관에는 무령왕릉 내부 발굴 당시 모형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근처의 공주박물관에 가면 재현한 관의 모습 및 주요 유물들을 실제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출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모형관을 나서면 출토 당시의 상황이 재현 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돌판이 입구에 놓여있던 묘지석이며 위의 돈이 매지권에 적혀진 대로 놓인 돈 오수전입니다. 위에
보이는 동물 모양의 석수는 묘지를 지키는 신비한 동물 진묘수입니다.
발굴 당시의 묘실과 놓여 있던 유물들을 재현해 놓은 모형입니다.
장식품등을 보아 허리띠가 놓인 우측이 무령왕, 왼편이 무령왕비의 자리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전시실 밖으로 나오면 무령왕릉 출토 유물 배치도와 묘지석 모형을 통해 관람객들이 실제 무령왕릉의 유물들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고 공부해 볼 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또한 발굴 당시 찍은 영상물을 볼 수 있도록 상영하고 있었는데요.
영구비공개로
앞으로 왕릉은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지만 보존되어있는 영상자료를 통해 그 당시의 모습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입구에 몰려든 취재진들을 보니 발굴 시 발굴단의 조급하고 급박했던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듯 했습니다.
체험관 밖으로 나와 왕릉으로 향하니 5호분, 6호분과 그 사이 봉긋 솟아 올라있는 무령왕릉이 보입니다.
오늘도
관람객들은 무령왕릉을 통해 1500년 전 백제의 문화와 시대적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갑니다.
고구려에게 밀려나 도읍지인 한강지역을 벗어나 공주에 다시 터를 잡았던 백제.
1500여년 전 다시 힘을 키우고 문화를 꽃 피워 중국, 일본, 멀리는 인도까지 문화를 알리고 받아들였던 백제를 무령왕릉을 통해 웅진도읍기 공주지역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충남 공주시 왕릉로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