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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00년 전 현대인이 제시한 의리와 절개

추사 고택에서 세한(歲寒)의 마음을 읽다

2023.02.28(화) 17:35:41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추사기념관 전시품 촬영.

▲ 추사 김정희 세한도. 추사기념관 전시품 촬영.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한결같은 지조로 19세기 조선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 글씨와 그림은 물론 시와 산문, 금석학에 이르기까지 실학자이자 예술가로서 최고 경지에 올라 200년 전 현대인으로 불리는 그의 고택을 찾아 세한(歲寒)의 마음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추사 김정희 묘의 소나무. 마치 또 다른 세한도를 보는 것 같다.

▲ 추사 김정희 묘앞의 소나무. 또 다른 세한도를 보는 것 같다.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몇 그루가 한겨울 추위에 서 있는 그림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의 그림으로 조선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고 있는데 발문이 압권으로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당장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는 의리와 절개를 압축해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55세에 제주로 유배가 8년여를 견디던 추사는 역관 출신의 제자 이상적이 중국에서 귀한 책을 구해 보내오자 사제의 의리와 인품을 기리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입니다.

추사 고택의 추사기념관 전경.

▲ 추사 고택의 추사기념관 전경.


추사고택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그의 증조부 김한신이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영조로부터 하사받은 저택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53칸 크기의 저택으로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 등 일부만 남았지만, 높다란 솟을대문에 당당한 기와지붕이 아직도 위풍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택의 신축비용은 내탕금에서 보내지 않고 충청도 감영 산하 53개 군현마다 한 칸씩 분담시켜 지었다고 하니 사실은 충청도 백성들이 지어준 셈입니다.

추사고택 솟을대문. 양반가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 추사고택 솟을대문. 양반가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추사고택 솟을대문. 안에서 바라본 모습.

▲ 추사고택 솟을대문. 안에서 바라본 모습.


솟을대문을 들어서 마주하는 사랑채는 ‘ㄱ자’형의 별당으로 안채와 분리됩니다. 좌우로 한 칸과 두 칸씩 방이 있는데 툇마루로 내왕할 수 있습니다. 대청마루는 들어열개문이 설치되어 사랑채 특성인 확장성과 개방성을 잘 살린 구조입니다. 많은 손님을 맞기에 적합한 구조입니다.

추사고택 사랑채 전경.

▲ 추사고택 사랑채 전경 1.


추사고택 사랑채

▲ 추사고택 사랑채 전경 2.


마당에는 추사가 세운 해시계가 있고 석년(石年)이라 새겨져 있는데 그의 아들 상우의 글씨라고 합니다. 대학자의 고택인 만큼 과거 수 만권의 장서가 보관됐지만, 1910년 무렵 화재로 소실됐다니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추사고택 사랑채 해시계. 추사가 세우고 글씨는 아들이 썼다.

▲ 추사고택 사랑채 해시계. 추사가 세우고 글씨는 아들이 썼다.

   
사랑채를 돌아 들어가는 안채는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완전히 밀폐된 ‘ㅁ자’형입니다. 원래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직접 보이지 않도록 내외벽이 설치됐었다고 하는데, 1970년대 수리하면서 이를 철거하고 안마당에 곧바로 진입하도록 바꿨다고 합니다.

추사고택 안채 중문.

▲ 추사고택 안채 중문.


추사고택 안채 전경 1.

▲ 추사고택 안채 전경 1.


안방과 건넌방, 부엌, 광이 있고 대청마루는 6칸에 달합니다. 안채 부엌은 일반의 살림집과 달리 난방용으로만 사용하고 요리공간은 별도로 두었는데 이는 왕족인 화순옹주가 살아 왕실의 건축구조로 지었기 때문이랍니다.

추사고택 안채 안방.

▲ 추사고택 안채 안방과 대청.


추사고택 안채 문살.

▲ 추사고택 안채의 문살.


추사고택 부엌. 난방용으로만 사용됐다.

▲ 추사고택 부엌. 난방용으로만 사용됐다.

   
화순옹주는 부마인 김한신을 엄청나게 사랑했나 봅니다. 김한신이 39세로 요절하자 14일간 식음을 전폐한 끝에 따라 죽어 조선 왕족의 여인 가운데 유일하게 열려문을 받았습니다. 다만 영조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여 열녀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정조대에 이르러 열녀의 첩지를 받게 됩니다.

추사 김정희 증조모인 화순옹주 열려문.

▲ 추사 김정희 증조모인 화순옹주 열려문.

   
안채를 나와 오른쪽 뒤편 계단을 통해 오르면 김정희를 추모하는 영당이 있습니다. 1856년 추사가 숨지자 그의 오랜 벗 권돈인이 ‘추사 영실’라 원본을 쓰고 현판을 각인했다고 합니다. 영정은 그의 제자 이한철이 대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는데 원본은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추사고택 추사

▲ 추사고택 추사영실로 향하는 계단.


추사영실. 현판은 권돈인이 쓰고 영정은 이한철이 그렸다.

▲ 추사영실. 현판은 권돈인이 쓰고 영정은 이한철이 그렸다.

  
추사고택과 인근의 추사기념관에는 김정희가 생전 100여 가지의 호를 사용하며 일생을 담은 현판과 편액, 문인화가 눈을 호강시켜 줍니다. 고택의 나무 기둥마다 글귀를 담은 ‘주련’을 살피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주련의 아래에는 해설이 되어 있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채에 걸린 竹爐之室(죽로지실)은 친구 치원 황상에게 써준 현판으로 그 뜻은 ‘차를 달여 마시며 항상 차향이 그윽한 서재'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추사고택 사랑채에 걸린 현판 '죽로지실'

▲ 추사고택 사랑채에 걸린 현판 '죽로지실'


서예에 대한 추사의 천재성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하는데 겨우 일곱 살에 쓴 글씨를 우연히 본 채제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실학자의 대가인 박제가 역시 추사의 천재성에 제자로 삼았는데 이때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으로 금석학을 연구했고 추사체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금석학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하기도 했습니다.

추가고택 나무기둥에 걸린 주련. 문장아래 설명문이 있다.

▲ 추가고택 나무기둥의 주련 1. 문장아래 설명문이 있다.


추사고택 나무기둥의 주련 2.

▲ 추사고택 나무기둥의 주련 2.

  
2월의 마지막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추사고택은 이제 세한의 그림자를 넘어 봄의 속삭임이 가득합니다. 다가올 춘삼월 고택의 마당에는 매화를 시작으로 영당 옆 화단에서 수선화가 만개해 화려하고 고운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고고한 색상인 자줏빛 목련도 백목련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뤄 나갈 것입니다. 이곳에서 200년 전 현대인 추사 김정희를 만나보심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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