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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김 호연재를 그리며

내포칼럼 -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

2022.10.24(월) 15:21:28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김호연재를그리며 1


충청의 대표 여성 선비
김 호연재(1681~1722)

244수의 한시에 담긴
탁월한 '젠더 감수성'

웅대한 포부를 가졌던
시대를 앞서나간 여성


‘우리 역사에서 여성 선비는 없을까요?’ 요즘은 이런 질문을 하는 시민들이 많다. 알고 보면, 우리 충청도에는 이름난 여성 선비가 많았다. 김 호연재(1681~1722)가 대표적인 분이었다. 김씨 부인은 ‘호연지기(浩然之氣)’ 즉,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는 활달함을 추구해 호연재라는 호를 즐겨 썼다. 그분의 생애는 당대의 석학이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글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호연재는 우리나라 최고의 선비 집안 출신이었다. 그분은 홍주(현 홍성군) 출신으로, 군수 벼슬을 한 김성달의 따님이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고손녀였다. 호연재 부인의 시가(媤家)도 굴지의 명망가였다. 부군인 송요화(宋堯和)는 이름난 학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증손이었다. 친정어머니 역시 빼어난 문장가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이었다.

김원행이 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호연재는 유교 경전과 역사에 능통하였고 한시를 참 잘 지었다. 행실도 매우 삼가서 여성의 도리를 잘 닦았다. 부인은 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오래 섬기지 못한 것을 원통스럽게 여긴 나머지 아직 살아계신 시숙부를 최후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그런데 호연재를 가장 호연재 답게 만든 것은 저술이었다. 평생 무려 244수나 되는 한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 떠나온 친정 마을을 그리워하는 작품이 여럿이었다. <달을 바라보며 고향집을 생각한다>라든가 <고향 집을 떠난 마음 날로 근심이 깊어>, <꿈에 집으로 돌아가다> 등이 있다. 호연재의 작품은 『호연유고(浩然遺稿)』라는 책자로 정리되었으며, 그밖에도 여러 편의 글이 남아 있다.

기왕 말을 꺼낸 김에 <꿈에 집으로 돌아가다>를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규방 여인으로 태어났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 아, 이 몸이 할 수 있는 일/ 무엇이 있을까 보냐// 뜻은 있어도 말조차 꺼낼 수 없다오/ 글을 가지고도 감히 어찌할 수 없네// 소리를 죽여 통곡하나니/ 눈물이 내 옷을 적시누나.’ 뜻이 고상하고 포부가 웅대한 여성 선비의 고뇌가 이보다 더 절실히 표현된 예를 필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호연재의 ‘젠더 감수성’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한 편의 시로 어찌 호연재의 생각을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다시 <술에 취해>라는 시도 함께 읽어보자. ‘술에 취하자 천지가 드넓어지네/ 마음을 열고 보면 만사가 화평도 하네// 초연히 자리에 드러누웠다네/ 즐겁기만 하여 잠시 어찌할 바 몰랐네.’ 평소에는 우울해하다가도 한잔 술을 마시면 흡사 영웅호걸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호방해지는 이가 호연재였다. 부인의 우울과 호방함은, 당대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이 강요한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싶다.

호연재는 자신을 일컬어,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술 취한 미치광이’라고 하였다. 일상의 괴로움 잊으려고 부인은 때로 술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 남초(담배)를, “근심에 가득한 내 속을 풀어주는 약”이라고 말하며 사랑하였다. 시대를 앞선 탁월한 여성이었기에 호연재 부인은 낡은 가치관의 속박에 몹시도 큰 괴로움을 느낀 것이었다.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호연재는 얼마나 좋아할까. 올가을에는 부인을 마나기 위해 동춘당을 꼭 찾아갈 생각이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동춘당공원 안에는 호연재의 거처가 남아 있어 방문자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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