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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망각의 세월과 '화해' 한여름 성주사지의 ‘개망초’

안개 꽃밭을 거니는 착각 속의 싱그러운 향기

2022.08.08(월) 14:56:40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보령 성주사지에 피어난 야생화 '개망초'
▲ 보령 성주사지에 피어난 야생화 '개망초'

여름철 길가나 공원 한편에 빽빽이 들어차 무리지어 피어나는 야생화 ‘개망초’. 바람이 불어오면 하염없이 흔들리다 살며시 싱그러운 향기를 보내줍니다. 여름이 최고조로 치달은 8월 한들한들 춤추는 개망초 군락지가 마치 안개꽃밭을 걷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보령 성주사지를 다녀왔습니다. 

보령 성주사지

▲ 보령 성주사지 문화재지킴이봉사단 교육장 담벼락의 능소화.


충남 보령시 성주사(聖住寺)는 신라 말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번창하였던 성주산문을 열었던 곳이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폐사됐습니다. “수도승의 공양을 위해 쌀을 씻은 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리나 흘러내렸다”는 말이 전했질 정도였는데 최근 발굴을 통해 본전의 규모가 동서 220m, 남북 142m의 웅장한 사찰임이 확인됐습니다.

원래 백제시대(599년) 만들어진 사찰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오합사’라고 불렸지만, 통일신라 말기 무염국사가 이 절에 머물면서 ‘성인이 있는 사찰’이라는 뜻의 ‘성주사’(聖住寺)로 바뀌고 산도 마을 이름도 그에 따라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발굴로 확인된 성주사의 규모.
▲ 발굴로 확인된 성주사 본정의 규모.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새하얀 수천여평의 사지에 활짝핀 개망초 군락지를 만나게 됩니다. 조그마한 바람에도 흔들흔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듯 피어난 꽃밭을 걷노라면 서북쪽 석축 앞으로 전각 하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국사(801~888)의 부도비인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聖住寺址 大朗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입니다. 낭혜화상은 태종 무열왕의 8세손으로 열세 살에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출가해 88세에 입적한 고승으로 열반 이후 왕명에 따라 그를 위해 비를 세운 것입니다. 
 
보령 성주사지 대냥혜화상탑비 전각.
▲ 보령 성주사지 대냥혜화상탑비 전각.

스물 한 살에 당나라 유학길을 떠난 그는 선종의 영향을 받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 보살펴 중국에서 ‘동방대보살’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25년 만에 귀국해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에 빠진 신라 불교의 교종을 비판해 많은 이의 호응을 받았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가 20,00여 명에 이르고 이들이 훗날 선종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이룹니다.

보령 성주사지 천년의역사관 실감콘텐츠.
▲ 보령 성주사지 천년의역사관 실감콘텐츠.
 
대낭혜화상탑비는 무염국사 사후 2년이 지난 뒤 세워진 것으로 높이 4.55m, 폭 1.57m, 두께 0.42m 크기로 규모는 물론 현존하는 신라 부도비 가운데 기법에서도 최고 수준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비 받침은 꽃과 구름이, 머리에는 연꽃 받침에 구름과 용이, 맨 윗부분에는 용머리가 화려하게 조각되고 있습니다. 비신은 남포 오석으로 높이 2.63m에 신라 최고 문장가로 유명한 최치원이 지은 5,120자가 그의 사촌동생 최인곤의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다만, 비신을 받치는 거북의 오른쪽 얼굴이 깨어져 아쉬움을 주지만 왼쪽 머리 위쪽의 솟아난 뿔과 불거진 눈, 벌어진 입 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북의 뒷모습인 등에는 이중 육각 무늬가 선명하고 말라 올린 꼬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듯 합니다. 부도비 전각 옆으로는 ‘연화대석’과 부도의 지붕돌로 추정되는 조각들이 놓여 있는데 인근 마을 연자방아로 사용하던 것을 찾았다고 합니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오른쪽 귀부가 훼손되어 있다.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오른쪽 귀부가 훼손되어 있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후면부.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후면부. 육각이중무늬와 꼬리가 선명하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연화대석.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부도 지붕돌(추정) 등. 
   
전각을 등지고 성주사지를 바라보노라면 마치 “절터의 중심은 여기”라고 시위하듯 오층석탑(보물 제19호)이 세워져 있습니다. 2중 기단에 5층 석탑으로 높이 6.34m입니다. 기단부와 탑신석이 균형을 이뤄 전체적으로 우아하지만 지붕돌 너비가 비교적 작아 전체적으로는 홀쭉한 인상을 줍니다. 1층 몸돌에 사리공이 기단부와 1층 몸돌사이에 괴임돌이 특징입니다.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석등.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 양식은 2중 기단에 3층 석탑이지만, 이 석탑은 5층 석탑으로 이는 보령이 옛 백제의 땅이었기에 백제 양식과 혼합했거나 당시 나타나 다양한 탑 양식의 하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 탑 상륜부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5층 석탑 앞에 세워진 성주사지석등(충남도유형문화재 제33호)은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팔각 지붕돌 위의 상륜부는 파손되었지만 근래 수습했다고 합니다.
 
보령 성주사지 석등. 상륜부는 파손
▲ 보령 성주사지 석등. 팔각지붕 상륜부는 파손됐다.

오층석탑의 뒤로는 크기와 모양새가 비슷한 삼층석탑 3개가 마치 경호를 하듯 세워져 있습니다. 보통 절에서는 1개의 금당에 1개의 탑을 세우지만 성주사는 5층 석탑을 세운 이후 무슨 연유인지 석탑 3개를 후면에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거의 유일한 사례입니다.
 
보령 성주사지 3층석탑. 5층 석탑의 뒤로 3층 석탑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보령 성주사지 3층석탑. 5층 석탑의 뒤로 3층 석탑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맨 오른편 동 삼층석탑(보물2021호)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지만, 성주사 사적기록에 따라 장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로 추정됩니다. 2층 기단에 3층 석탑으로 면석과 몸돌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에는 층급 받침이 새겨져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이는 몸돌안의 사리공에 부처의 유골이 모셔져 있음을 상징합니다.
 
보령 성주사지 동3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동3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동3층석탑의
▲ 보령 성주사지 동3층석탑의 1층 몸돌.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은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높이 4.1m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지만 상륜부가 없어졌습니다.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입니다. 이 역시 승탑으로 추정되었지만 조사 결과 장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의 중의 하나로 추정됩니다.
 
보령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1층 몸돌의 문양.
▲ 보령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1층 몸돌의 문양.
   
가장 왼편의 성주사지 서삼층석탑(보물제47호)는 높이 4.43m의 2중 기단에 3층 석탑으로 면석과 착신석에는 우주와 택주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받침이 새겨진 통일신라말기 전형적 3층 석탑 양식을 보여줍니다. 지붕돌의 작은 구멍은 불교행사 때 금동판 또는 기타 장식품을 매달아 탑이 화려해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 탑도 상륜부가 없어졌습니다.
 
보령 성주사지 서3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서3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서3층석탑 1층 몸돌 문양.
▲ 보령 성주사지 서3층석탑 1층 몸돌 문양.
   
석탑의 뒤편 오른쪽으로는 성주사지 석불입상(충남도문화재자료)이 세워져 있습니다. 고려말 혹은 조선초 시기에 만들어진 민불입니다. 원래부터 성주사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절 주변에 있던 것을 어느 시기인지 모르지만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상 얼굴은 타원형인데 코와 오른쪽 귀는 심하게 풍화되어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고 남아 있는 옷의 주름으로 보아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입니다. 손의 모양은 없어졌고 발은 간략하게 선으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법의는 양 어깨를 모두 덮고 발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지금은 미륵불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이밖에 성주사지 석계단(충남도문화재자료 제140호)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이 계단의 양쪽으로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 1986년 도난당해 현재는 당시의 사진을 기초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보령 성주사지 석계단.
▲ 보령 성주사지 석계단.

성주사지를 둘러보았다면 땀도 식힐 겸 입구의 천년역사관을 둘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등 각종 실감콘텐츠로 성주사의 역사적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보령 성주사지 천년역사관 전경.

보령 성주사지 천년역사관 전경.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라고 합니다. 누군가 관심도 주목도 해주지도 않지만 성주사지의 돌탑과 전각과 함께 한가롭게 절터를 찾는 이들을 맞아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전란 이후 옛 영화를 되찾지 못했지만 수 백년 망각의 세월과 화해의 손짓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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