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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무지(無知), 가장 무서운 것이다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4) 야학을 열다

2022.07.05(화) 23:24:13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공동묘지 묘표사건 기록화(이종상 교수 作

▲ 공동묘지 묘표사건 기록화(이종상 교수 作



윤봉길은 오치서숙을 나온 뒤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아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이 되었다. 윤봉길은 아동들에게 천자문만이 아니라 한글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사실을 ‘17세에는 개도 아니 먹는 똥을 누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자필이력서’에서 적고 있다. 윤봉길은 18살이던 1926년 가을에 친구들과 함께 야학당을 개설하였다. 그가 야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오치서숙에서 공부할 때 겪었던 공동묘지 묘표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마을의 공동묘지 쪽에서 나무로 된 묘표(墓表)를 한 아름 들고 오는 낯선 아저씨를 만났다. 오랜만에 온 탓에 자기 아버지의 묘를 확인할 수 없어 주위의 묘표를 뽑아 와서 아버지 묘표를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윤봉길은 그분이 말한 나무 푯말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청년은 아버지 묘표를 찾은 것을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온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혹시 이 푯말을 뽑은 자리에 무슨 표시라도 했소?”라고 묻자 이 청년은 멍하니 푯말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다면 당신 선친의 묘표는 찾았지만 산소는 어떻게 찾으려 하시오!” 이 청년은 자신의 아버지 묘는커녕 다른 이의 묘 주인도 구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때 윤봉길은 총독부의 철권통치보다도 무서운 것이 ‘무지’(無知)라는 사실을 깨닫고 야학을 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나이를 불문하고 이름자를 못 쓰는 어린이와 어른들을 위한 야학운동을 시작하였다. 야학에 공부하러오는 이들이 처음에는 몇 명 없었다. 낮에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봉길은 친구들과 온 마을을 돌며 야학에 나올 것을 권유하자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야학을 시작했는데 학생이 늘어나자 마을 어른들의 도움으로 3칸짜리 교실을 지었다. 야학에서는 갑, 을 2개 반으로 나누어 갑반은 한글을 가르치고, 을반은 역사와 지리, 산술 등을 가르쳤다. 

그런데 얼마 안가 역사와 지리 수업은 경찰의 단속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를 탄식만 하지는 않았다. 당국의 감시를 피하여 역사를 교육하는 기발한 방법을 찾았다. 단속을 피하기 위하여 한글 교과서 속의 글을 칠판에 써 놓고 우리 역사와 위인의 전기를 가르쳤다. 윤봉길의 교육 방식은 상당히 엄했다. 부인과 동생들도 야학에 나오게 하여 가르쳤는데, 여동생들도 많이 혼났다. 그런데 부인에게만은 관대하여 여동생들한테 불공평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한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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