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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칼럼

“상투 대신 목을 자르라” 외친 면암 선생을 떠올리며

윤성희의 만감萬感- 면암 최익현 사우 모덕사

2022.05.25(수) 22:08:4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면암고택 안채

▲ 면암고택 안채



친일 내각 단발령에 대항해 맞서
을사늑약 계기로 항일활동 전개
일제도 찬양해 마지않던 그의 충절


청양군 목면 송암리 야트막한 야산을 병풍 삼아 두른 곳에 자리한 모덕사(慕德祠). 맞은편에서는 아담하고 깊푸른 우목저수지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고즈넉한 윤슬을 밀어내고 있다. 그 서정적인 풍광을 바라보다 문득, 신이 세상을 만드실 때 하루 정도는 한가로움에 잠겨보라고 이런 풍경을 만들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구한말 한 선비의 고결하고 날카로운 정신 앞에서 나는 웬 사치스런 감상에 정신줄을 뺏기고 있는가. 다시 느껴보니 모덕사의 바람결에서조차 오두가단 차발불가단(吾頭可斷 此髮不可斷), 머리는 잘라도 머리털은 못 자르겠다는 면암의 결기가 서늘하게 실려 온다.

고종 32(1895)년,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단발령이라는 희대의 칙령을 공포한 후 수많은 백성의 상투가 잘려나갔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유림의 거두들과 연명하여 이 야만적인 행태를 규탄하고 이에 분연히 맞섰다. 상투를 자르려면 차라리 목을 잘라라. 이는 70년대 청년들의 머리를 규제하던 공권력에 소심하게 반항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단순히 머리털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었다. 불의와 부패로부터, 개혁의 졸속과 강제성으로부터, 파당적 탐욕과 월권으로부터 민족의 자주를 지켜내고 정의와 정체성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면암은 격동의 시대를 꿰뚫는 싸움판에 나타난 마지막 전사였다. 그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의 뇌관들로 점철돼 있었다. 옳든 그르든 개화라는 시대의 세찬 흐름에 맞섰고, 매판의 첨병들을 향하여 도끼를 곧추세웠다.

1900년 면암은 말년을 보내려고 이곳 청양에다 집을 지었지만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1905년의 을사늑약은 비분강개한 그의 삶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내몰았다.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내고 서쪽으로 남쪽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된 것이 대의의 마지막 실천이었다.

대마도 유배지에서 왜놈의 음식도 물도 취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단식으로 74년 생애의 불꽃을 스스로 꺼트린 장렬한 죽음. 사해가 울었고, 고국의 사민이 모두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맨 먼저 일제의 이등박문이 만사(輓詞)를 보내와 백이(伯夷)와 같은 충절을 추모하였으니, 나머지 말은 군더더기가 될 것이다.
/윤성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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