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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葬)을 치른 사람은?

신분과 이념을 넘어 2500만 민중의 이름으로

2022.02.25(금) 10:20:51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흉상. 기념관내 독립문을 배경으로 제작 설치됐다.

▲ 월남 이상재 흉상. 기념관내 독립문을 배경으로 제작 설치됐다.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저명인사가 사망하면 사회 각계 대표가 자발적으로 모여 사회적 장례를 치릅니다.
최근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장례가 사회장으로 치러진 것처럼 말입니다.
1987
년 잔인한 국가폭력에 아들을 잃은 배 여사는 그의 삶을 인권운동에 바쳐 시대의 어머니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사회장은 국가에서 절차와 비용을 직접 전담하는 국장과 국민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민사회를 주축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예우를 갖춰 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747일 일제 강점기 신간회 회장과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며 신분과 이념을 넘어선 사회운동에 헌신한 월남 이상재의 장례가 최초의 사회장(이상재 기념관)입니다.

 

월남 이상재선생의 사회장

▲ 월남 이상재선생의 사회장


그의 사회장은 10만 인파가 몰렸는데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으로 시민 3분의 1이 애도 행렬에 참여한 것으로 선생이 민중들에게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결식이 진행된 서울역에서 선산인 충남 한산의 700리 연도에도 120여 단체와 2만여 조객들이 마지막 길을 지켜 3.1운동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운집했었다고 합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사회장. 이상재 기념관 제공

▲ 월남 이상재 선생 사회장. <이상재 기념관 제공>

 

겨울의 추위 속에 찾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이상재 선생의 생가는 상당히 깨끗하고 관리가 잘되는 느낌을 줍니다. 최근까지 복원 공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월남 이상재

▲ 월남 이상재 추모비.


이상재 선생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로 이뤄진 초가입니다
.
안채는
1800년경 사랑채는 1826년 무렵 신축했다고 전해지는데 원래 건물은 1955년 없어졌고 현재의 생가(충남도기념물 제84)1972년과 19802차례 걸쳐 복원된 것입니다.

 

충남 서천군 월남 이상재 생가.

▲ 충남 서천군 월남 이상재 생가 전경.

월남 이상재 생가 안내도.

▲ 월남 이상재 생가 안내도.


사랑채는 가운데 대청이
2칸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안채가 바라보이지 않도록 문이 달려 있습니다.
사랑채를 돌면 뒤편에 유난히 낮은 굴뚝이 눈길을 끕니다.
굴뚝 높이가 낮은 것은 위생과 사회적 배려입니다. 장작을 태운 연기를 이용해 지붕 초가를 소독하기 위한 것이며, 끼니를 거르는 주변에 밥 짓는 굴뚝 연기를 보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월남 이상재 생가 사랑채.

▲ 월남 이상재 생가 사랑채 전경.


월남 이상재 생가 사랑채 굴뚝.

▲ 월남 이상재 생가 사랑채 굴뚝.


솟을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농기구와 곡식 등을 보관하는 창고의 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 창고 뒤편에는 디딜방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생가 솟을대문.

▲ 월남 이상재 생가 솟을대문.


월남 이상재 생가 디딜방아.

▲ 월남 이상재 생가 디딜방아.


마당을 지나면 아담한 안채가 나오는데 코로나19 방역 문제로 방문과 부엌문이 모두 닫혀 있어 내부를 살펴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른편으로는 안채 살림을 위한 고방이 있습니다
.
가의 모든 건물은 잘 다듬어진 돌을
2단으로 쌓고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어 대체로 깔끔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월남 이상재 생가 안채 전경.

▲ 월남 이상재 생가 안채 전경.


이어 생가 옆에 조성된 기념관에서는 민족의식 고취와 인재 양성, 민족 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념관 옆의 좌상은 1986년 강남 YMCA회관에 제막된 것을 2018년 서천군의 요청으로 생가로 이전한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선생 기념관 전경.

▲ 월남 이상재선생 기념관 전경.


 

월남 이상재 월선생 좌상. 서울 강남 YMCA것을 이전했다.

▲ 월남 이상재 월선생 좌상. 서울 강남 YMCA것을 이전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1850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당시 한산군)에서 출생했습니다.
대 유학자인 이색의 후손으로 과거를 준비하던 선생은 부정부패의 현실 속에 이를 포기하고 1881년 일본사찰단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고 개화사상을 적극적으로 펼칩니다.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는 등 민족지도자로 항일운동에 헌신합니다.

 

월남 이산재 기념관. 과거 시험 준비 과정.

▲ 월남 이산재 기념관. 과거 시험 준비 과정.


투옥된 월남 이상재 선생.

▲ 월남 이상재는 국정개혁을 요구하다 1902년 투옥된다.


월남 이상재는 미국 공사관에 서기관으로 파견돼 선진문물을 익힌다.

▲ 월남 이상재는 미국 공사관에 서기관으로 파견돼 선진문물을 익힌다.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장소에 독립문을 세우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습니다.
조선교육협회 회장으로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웃)의 초대 총재로 활동하고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을 위해 1922년 조선일보(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는 1933)의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기독청년회(YMCA)

▲ 월남 이상재는 기독청년회(YMCA)와 소년척후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YMCA

▲ 월남 이상재는 YMCA를 통해 청년들의 교육운동을 펼쳤다. 


항일운동의 민족적 대동단결을 위해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가 단일전선을 결성한 민족유일당 신간회의 창립회장에 추대되었지만뜻을 펼치지 못하고 7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간회 회장

▲ 월남 이상재는 민족유일당 신간회 초대회장에 추대된다.

 

일평생 조국의 독립과 계몽에 헌신한 이상재 선생은 죽음도 겁내지 않는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로도 유명한데, 선생의 일화 2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선미술협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초청받은 선생이 행사장을 갔습니다.
식장에서 이완용과 송병준을 만난 선생은 일제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이들에게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이완용 등이 선생의 갑작스러운 말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자 선생은 이어 대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면 일본도 망할 게 아니겠소라며  그들의 매국 행위를 풍자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선생은 연설가로도 유명했는데, 강연장에는 항상 형사가 따라다녔습니다.

어느 날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행사사회를 보는 동안에도 청중 속 많은 형사가 동원돼 감시에 나서자 선생은 허허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구나라며 청중을 폭소에 빠트렸습니다.

당시 일본 형사는 순경은 나리로 불렸기에 형사와 순경을 합치면 개나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천에 여행계획이 있으세요?
신분과 이념 넘은 자주와 독립의 상징 월남 이상재 선생을 만나보세요. 2500만 민중의 이름으로 치른 사회장의 의미를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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