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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불사이군 vs 새왕조창업… '이색'의 선택은?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과 만나는 ‘문헌서원’

2022.02.23(수) 11:15:25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서천 문헌서원에 배향된 목은 이색.
▲ 충남 서천 문헌서원에 배향된 목은 이색.

서원은 선비 사상을 이끌었던 조선의 인문학 공간이자 선현을 기리는 곳입니다. 자연스레 지방 사림과 가문을 구심으로 발전했고 나아가 중앙 정치 세력의 기반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충남 서천군 문헌서원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개국이라는 정치적 풍랑 속에 새로운 지도 세력으로 성장한 신진 사대부의 정신적 스승이자 대학자 목은 이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의 동상.
▲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의 동상.
  
그런데 이색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각자 추구하는 길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불사이군을 지키며 망국 고려에 충절을 지킨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이 있는 반면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조선 왕조 창업에 앞장선 정도전과 하륜, 권근, 윤소종 등도 있었습니다.
이색 스스로는 불사이군을 선택했습니다.
문헌서원은 대개의 서원이나 향교가 그렇듯 구릉지형에 지어졌습니다.
강학을 앞쪽에 제례를 뒤쪽으로 배치하는 ‘전학후묘' 형식입니다.
하마(下馬)비가 세워진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을 향해 약간의 오르막을 오릅니다.

서천 문헌서원 홍살문.
▲ 서천 문헌서원 홍살문.

서천 문헌서원의 연못
▲ 서천 문헌서원의 연못

서천 문헌서원 비석군
▲ 서천 문헌서원 비석군

먼저 마주하는 강학 공간은 정문 격인 외삼문에서 직선으로 강당인 진수당(進修堂)이 있고 좌우로 유생들의 기숙사이자 학습공간인 존양재(存養齋)와 석척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서천 문헌서원 외삼문 전경.
▲ 서천 문헌서원 외삼문 전경.
 
강당으로 운영되는 진수당에 걸린 ‘文獻書院’액호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입니다.
송시열은 불사이군으로 고령에 충절을 바친 목은 이색을 특별히 존경하고 그를 배향한 문헌서원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고 합니다.
 
서천 문헌서원 진수당.
▲ 서천 문헌서원 진수당.
 
서천 문헌서원 진수당.현액. 우암 송시열이 썼다.
▲ 서천 문헌서원 진수당.현액. 우암 송시열이 썼다.
 
진수당 왼편으로는 서재인 석척재가 있습니다. 석척재는 주역의 건건석천에서 유래한 것으로 “군자는 낮이나 밤이나 힘쓰고 조심한다”라는 즉, 저녁에도 낮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이라 합니다.
 
서천 문헌서원 석척재(서재)
▲ 서천 문헌서원 석척재(서재)

맞은편은 동재인 존양재입니다. 존양재는 ‘맹자’의 ‘존양성찰(存養省察)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음의 본성을 지키며 자기 잘못을 살핀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서재와 강당인 진수당의 현판은 모두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합니다.
 
서천 문헌서원 존양재(동재)
▲ 서천 문헌서원 존양재(동재)

서원의 핵심 제향 공간은 내삼문인 경현문을 통해 들어가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한산이씨 명조 선현에 제향하는 효정사(孝靖祠)가 있습니다.
제향 인물은 이곡, 이색, 이종덕, 이종학, 이종선, 이맹균, 이개, 이자 등 8위로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서천 문헌서원 내삼문인 경현문.
▲ 서천 문헌서원 내삼문인 경현문.

서천 문헌서원 효정사.▲ 서천 문헌서원 효정사.

 

한산이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도 제향 공간입니다.
재실은 조상의 묘나 사당 옆에 세운 건물로 자손들이 이곳에 모여 묘제를 지내거나 종회를 여는 곳인데 구한말 영모재는 근대학교인 영모학교로도 이용되는 등 한산지역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서천 문헌서원 영모재.
▲ 서천 문헌서원 영모재.

장판각에는 서원에 배향된 이곡의 문집 ‘가족집’ 20권과 이색의 문집 ‘목은집’ 55권을 인쇄하기 위한 947개의 책판과 한산이씨 족보와 세보 501개가 보관되고 있습니다.
 
서천 문헌서원 장판각.
▲ 서천 문헌서원 장판각.

서천 문헌서원 전사실.▲ 서천 문헌서원 전사실. 제례에 필요한 집기를 보관한다. 

서원의 문을 나와 왼쪽의 기린산 중턱에는 이색의 묘(충남도기념물 제84호)가 있습니다.
묫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했다고 합니다. 원형 무덤 오른쪽에 ‘목은선생 이색지묘(木隱先生 李穡之墓)’의 묘비가 있습니다.
묘 앞으로 망주석과 문인석, 마석이 각각 2기씩 좌우로 대칭해 늘어서 있습니다.
 
서천 목은 이색의 묘.
▲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의 묘.

목은 이색의 묘에서 바라본 문헌서원. 전망이 탁 트였다.
▲ 목은 이색의 묘에서 바라본 문헌서원. 전망이 탁 트였다.

이색의 묘를 향하는 자리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신도비(문화재자료 제127호)가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 등의 업적을 비석에 새겨 묘 남동쪽에 세우는 것으로 신을 인도하는 길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 신도비는 1433년(세종15) 하륜이 세운 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자 1666년 송시열 등이 참여한 가운데 후손들이 다시 세웠고, 1904년 앞면의 비문을 깎아 내고 다시 썼다고 합니다.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 신도비
▲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 신도비

신도비 뒤편으로는 목은 이색을 모신 영당에 초상화(보물 1215호)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색 영정은 원래 관복과 평상복 차림 두 종류가 있었는데 현재는 관복 차림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복 영정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입니다.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 영당.
▲ 서천 문헌서원 목은 이색 영당.

문헌서원은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비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891년 옛터에 단을 설치하고 제향하였고 1969년 현재 위치로 이건 된 이후 중앙정부와 서천군의 전통 역사 마을 조성 사업에 따라 2007년부터 5년여 동안 재정비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때 서원 입구에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전통 한옥 호텔과 음식점을 만들었습니다. (http://munheon.org/) 다만, 코로나19로 음식점은 현재 운영이 잠정 중지되어 있습니다.

서천 문헌서원 한옥 호텔 전경.
▲ 서천 문헌서원 한옥 호텔 전경.

한옥 호텔은 독립된 건물마다 객실을 2~3개씩 배치해 조용하고 여유 있게 쉴 수 있으며, 숙박하지 않아도 누마루와 툇마루, 정자 등에서 차 한잔 여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개별적 숙박은 물론 모임과 세미나, 학회 등 단체숙박의 전체대관도 가능합니다.
마당에는 야생화가 철마다 피고 텃밭의 깻잎, 고추, 오이 등 제철 채소는 쌈과 부침개가 되어 손님들의 허기를 달래 줍니다.

서천 문헌서원 한옥 호텔 숙박동.
▲ 서천 문헌서원 한옥 호텔 숙박동.

서천 문헌서원 전통음식점 전경.
▲ 서천 문헌서원 전통음식점 전경.

국가 멸망이란 거대 변혁기는 언제나 복잡한 국내외 원인이 얽히고 거기에 주도 세력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500년을 이어온 고려가 조선으로 이행하는 과정 또한 다르지 않았고, 고려의 마지막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시대환경을 당당히 감내하며 고려 왕조 마지막을 지킨 목은 이색과 문헌서원에서 교감을 나눠보시면 어떨까요?

서천 문헌서원 산책로 모과나무 아래 의자.▲ 서천 문헌서원 산책로 모과나무 아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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