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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영조가 이삼 장군에 종택을 하사한 까닭은?

무(武)반 가문 대표 고택 논산 백일헌 종택

2022.01.03(월) 11:06:15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백일헌 이삼 고택의 콘사랑채. 마루에서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 백일헌 고택의 큰사랑채. 마루에서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됐다.

충남 논산의 대표 고택으로는 명재 윤증과 백일헌 이삼 종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비슷한 시대를 살기도 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의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여기에 명재는 문인으로, 백일헌은 무인으로 각각 문무 양반가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백일헌 종택은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산기슭의 경사지를 잘 활용해 무인의 기상을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병풍처럼 배경이 되어주는 굴참나무 군락지와 솟을대문 옆 은행나무는 종택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룹니다. 집안 곳곳의 툇마루와 대청, 누마루 등 실용성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백일혼 종택 전경

▲ 백일헌 종택 안내도 

백일헌 이삼은 무과에 급제해 출사한 뒤 훈련대장에 올라 이인좌의 난을 평정(1728년)한 공로로 이등공신에 올라 영조에게 종택을 하사받았습니다. 종택을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하사금과 노비, 자재, 목수를 지원받아 신축했는데, 300년에 가까운 세월에도 창건 당시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해 국가 중요민속문화재(제273호)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백일헌(白日軒)이란 호 역시 영조가 이삼 장군이 죽자 “충절이 백일을 꿰뚫었다(忠貫白日)”며 하사한 것입니다.
 
백일헌 이삼 장군 종택. 이인좌의 난을 평장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하사 받았다.
▲ 백일헌 이삼 장군 종택. 높은 계단이 무인의 기상을 과시한다.

종택은 전형적인 조선 상류 주택의 구성요소인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돼 있습니다. ‘ㄷ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이어져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룹니다. 안채 평면구조는 중앙에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윗방, 우측에 건넌방을 배치한 팔작지붕입니다.

백일헌 종택의 안채. 후손들이 거주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 백일헌 종택의 안채. 후손들이 거주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사진 백일헌 홈페이지>.


솟을대문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 문간채 오른편에 수백 년 풍상을 이겨낸 은행나무가 손님을 맞아줍니다. 연두의 봄, 초록의 여름, 노란 가을을 수놓았을 은행나무는 무인이던 백일헌 이삼이 말고삐를 매던 곳인데 마당과 같은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바라본 백일헌 고택 문간채. 왼쪽 은행나무는 이삼 장군이 말을 매어두던 곳이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백일헌 고택 문간채. 왼쪽 은행나무는 이삼 장군이 말을 매어두던 곳이다.

이어 마주한 사랑채는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은 기단 위에 있습니다. 안채로 향하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편은 큰 사랑방으로 2단 툇마루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마을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중문 오른쪽 작은 사랑방도 툇마루가 설치돼 사용이 편리하도록 배려 했습니다. 오른쪽 언덕 위로는 고택에서 가장 높은 장소로 담장이 둘러 사당을 만들었습니다.

자연석 기단위에 배치된 사랑채와 안해를 향하는 중문.

▲ 자연석 기단위에 배치된 사랑채. 가운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설치되어 있다. 

백일헌 종택 사당.

▲ 백일헌 종택 사당.


큰 사랑방 누마루에는 현판 오목제(梧目齊)가 걸려 있습니다. “오동나무처럼 가지런한 마음”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툇마루의 기둥과 서까래는 간결하게 사용됐고 처마선은 아름답습니다.

백일헌 종택 작은 사랑채.

▲ 백일헌 종택 작은 사랑채. 

백일헌 종택

▲ 백일헌 종택. 굴뚝 위의 항아리가 눈길을 끈다. 


사랑채 옆으로는 낮은 담을 쳐 안채를 감싸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한옥은 담장 높이를 일정하게 쌓지만, 이곳은 본채 주변의 경사지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자유롭게 구성했습니다.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안채는 후손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방문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아 담장 너머로 보고 한국관광공사와 백일헌 홈페이지 공개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이삼헌 종택 안채.

▲ 백일헌 종택 안채를 둘러싼 담장. 


백일헌 종ㅊ택

▲ 백일헌 종택 안채 뒤편으로 넓게 자리한 뒤뜰.  

백일헌 종택 처마에 매달아 보관 중인 말린 나물과 약재.

▲ 백일헌 종택 처마에 매달아 보관 중인 말린 나물과 약재.

 
이삼은 12살에 명재 윤증과 제자와 스승으로 인연을 맺습니다. 예학의 거두 윤증과 만남은 청소년기 이삼에게 학문과 인격을 갖추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무관 외 문관으로서 능력도 함께 길렀을 것입니다.
   
이삼이 무관 과거에 장원급제해 출사하고 무관의 중심으로 성장하던 시기 조선은 계속되는 사화로 어지러웠고 집권 세력인 서인의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입니다. 당시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일찍 죽고 노론의 지원을 받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위기감을 느낀 소론과 일부 남인을 중심으로 ‘이인좌 난’이 일어납니다. 이는 당쟁이 내란으로 발전한 것으로 영남 우도를 기반으로 하는 사림을 주축으로 영조의 혈통과 승위과정을 문제 삼아 군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 훈련대장이던 이삼은 토벌대장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했고, 영조는 난에 가담했던 역모들의 가산을 몰수 하사해 집을 짓도록 했는데 지금의 백일헌 종택입니다. 백일헌 종택은 고택 이외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공신 책봉 교서를 비롯해 고문서와 언월도, 철퇴, 영정 등 유품을 남겨 일부가 논산 백제군사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특히 고택이 있는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는 지난 500여 년간 장승제를 지내는 등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로 주민들의 자부심이 또한 대단합니다. 주곡리 장승은 연산군 4년(1498) 낙향한 청주양씨 9세손 첨정공 춘건(春健)이 주민 화합을 위해 마을 어귀에 세워 수호신으로 삼고 장승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마을 안내문.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마을을 습격하면서 장승을 사람으로 오인해 조총을 쏘았지만, 물러나지 않자 겁을 먹고 진입을 주저하는 사이 주민들이 피신해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이후 왜란이 평정되고 선조는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위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주곡리에서는 지금도 음력 정월 14일이면 500여 년 전통의 장승제(논산향토문화유적 2호)가 맥을 잇고 있습니다.

500여 년 장승제가 맥을 잇고 있다.

▲ 500 여 년 장승제 맥을 잇고 있는 논산 주곡리.

  
충청도 무반 가문을 대표하는 논산 백일헌 종택과 산책로에서 코로나19로 무거워진 몸과 마음에 힐링을 선사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곳을 방문했다면 명재 윤증 고택 방문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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