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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행단(杏壇)은 살구나무일까요? 은행나무일까요?

중국에 공자행단이 있다면 한국은 맹씨행단이 있다.

2021.11.18(목) 13:44:48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산 맹씨행단의 수령 600여 년의 쌍행수.
▲ 아산 맹씨행단 수령 600년을 넘긴 쌍행수.

봄이 오는 길목인 살구꽃 필 무렵 공자는 제자들과 밖으로 나와 문답을 통한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식으로는 ‘야외수업’인 셈입니다. 당시 학습여건이 실내수업을 고집할 만큼 여건이 안되었기 때문인데, 살구나무 아래 흙으로 단을 만들고 대나무를 역은 죽간을 교재로 제자들과 경전을 공부했는데 이를 ‘행단(杏壇)’이라 합니다.
 
여기서 ‘행’은 원래 살구나무를 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맹씨행단입니다. 국내 유학을 대표하는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도 행단은 살구나무 대신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가 됐는지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자가 행단에 살구나무를 심었던 것을 한국에서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국내 유명 유학자의 저서나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살구나무로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은행나무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행단은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해 살구나무와 차이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 산둥성 취푸(曲阜)에 공자의 행단이 있다면 한국에는 충남 아산시 배방면에 맹씨행단(孟氏杏壇)이 있습니다. 맹씨행단은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이자 명정승 고불 맹사성(1360~1438)의 고택으로 우리나라 민가(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주택입니다. 물론 현재 모습이 처음 건축 당시를 그대로 간직한 것은 아닙니다. 14세기 중엽 신축해 성종 13년(1482) 안채를 크게 고치는 등 1970년까지 600여 년 동안 4차례 정도 대수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맹사성 고택의 대문. 최근 대수선을 마쳤다.
▲  맹사성 고택의 대문. 최근 수선을 마쳤다.

맹씨고택 입구를 지나 쌍행수로 이어진 돌담길.
▲ 맹씨고택 입구를 지나 쌍행수로 이어진 돌담길.

뒷 동산에서 바라본 맹씨행단의 전경.
▲ 뒷 동산에서 바라본 맹씨고택 전경.
   
고려부터 이어온 고택은 사적(제109호)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당기는 것은 낮은 돌담을 두른 마당의 은행나무 두 그루입니다.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는 이 은행나무는 600년의 수령에도 지금도 봄이면 연두에서 여름에 초록으로, 가을에는 노란빛으로 고택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고령이지만 해마다 5가마니씩 은행을 수확한다고 합니다.

수령 600년의 고령에도 은행이 풍성이 달려있다.
▲ 수령 600년의 고령에도 은행이 풍성이 달려있다.

마주 보는 은행나무라는 뜻의 ‘쌍행수’로도 불리는데 맹사성은 나무를 심고 보호하기 위해 축대를 쌓고 뜻있는 인사들과 강학을 위해 단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처럼 늦가을이며 떨어지는 은행잎이 마당을 가득 덮어 고색을 더해주고, 방문객들에게 인생샷을 선물해줍니다.

맹씨행단 돌담길을 따라 떨어진 은행잎.
▲ 맹씨행단 돌담길을 따라 떨어진 은행잎이 주변을 덮고 있다.
  
쌍행수의 맞은편으로는 맹씨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자 모양으로 가운데 두 칸은 넓은 대청이고, 양쪽에 날개처럼 온돌방이 있습니다. 평면 구조가 지붕은 대칭을 이루고, 대청 위 용마루가 맞배지붕을 하고 좌우 온돌방은 보다 낮은 맞배지붕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고려 최영장군이 지어 손주사위 맹사성이 사용한 맹씨고택.
▲ 고려 최영장군이 지어 손주사위 맹사성이 사용한 맹씨고택.
  
이 집이 고려시대의 형태를 간직한 것은 기둥에 들보를 얹어 지붕을 구성했기 때문으로 고려 때 흔히 사용되었던 건축양식으로 현재 민가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마루대공 아래를 꽃을 엎은 모양의 복화반 방식도 가장 오래된 것 중에 하나 입니다.

대청 앞면에는 4개의 문짝이 달려있는데 이 가운데 한 칸만 사람이 드나들고 나머지는 창문의 개념입니다. 필요하면 모두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했습니다. 겨울이면 창문을 내려 대청을 실내공간으로 사용하고, 여름이면 모두 들어 올려 시원하게 열린 공간으로 활용했던 것 같습니다. 집 뒤쪽으로 돌아가면 건물과 일정거리를 두고 흙과 기와를 층층이 쌓고 기와지붕까지 올린 굴뚝 2개가 정겹습니다.

살림집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맹씨고택. 고려의 건축 양식이 남아있다.
▲ 살림집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맹씨고택. 고려의 건축 양식이 남아있다.
   
본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오른쪽 뒤편에는 맹사성과 그의 부친 맹희도, 조부 맹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가 있습니다. 맹사성의 부친과 조부는 조선건국을 반대하는 ‘두문동 72현’이라고 합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고려 태학의 72명이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의 배경입니다. 세덕사에서는 매년 10월10일 맹사성 탄신일을 맞아 그를 기념하는 숭모제향이 봉행됩니다.

맹사성과 부친 조부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
▲ 맹사성과 부친 조부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

맹사성과 부친 조부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 입구
▲ 맹사성과 부친 조부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 입구
  
맹씨행단은 넓은 정원과 뒷동산을 낮은 돌담으로 감싸고 있는데 소나무를 비롯해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로 아늑함을 줍니다. 어떻게든 관광지를 표시하기 위한 호들갑이 없어 고즈넉한 안정감을 줍니다.

맹씨행단 돌담길을 따라 떨어진 은행잎.
▲ 맹씨고택 돌담길과 어우러진 뒷동산의 소나무 군락지1.

맹씨행단 돌담길을 따라 떨어진 은행잎.
▲ 맹씨고택 돌담길과 어우러진 뒷동산의 소나무 군락지2.
  
맹씨행단 돌담길을 따라 떨어진 은행잎.
▲ 돌담길과 어우러진 맹씨고택 풍경.

맹사성, 황희, 권진 등 조선 세종때 정승을 지난 3명이 각각 3그루씩 9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정사를 논했다는 ‘구괴정(九槐亭)’을 가는 길도 황금빛 들녘을 볼 수 있어 산책길로도 그만입니다.

아산맹씨행단 맞은 편 주차장 인근에눈 고불맹사성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공원의 동상은 맹사성이 소를타고 피리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맹사성은 평생 가마 대신 검은소를 탔다고 하는데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소도 사흘을 먹지않고 울면서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맹사성기녀관 전경
▲ 고불 맹사성기념관 전경.

맹씨행단 진입로 오른편 길가에 조성된 비림
▲ 맹씨행단 진입로 오른편 길가에 조성된 '신창맹씨세거지비'

맹씨고택이 있는 마을 진입로 역시 고풍스럽다.
▲ 맹씨고택이 있는 마을 진입로.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

맹씨행단 문화해설사의 집.
▲ 맹씨행단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늦가을 은행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면 조금 추울까요? 대신 푹신하게 쌓인 노란 은행잎을 밝으며 돌담길을 따라 사색에 잠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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