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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보령 탐방①】자세히 살피니 귀하디 귀한 문화재, '보령 성주사지'

2021.09.17(금) 06:56:37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보령탐방자세히살피니귀하디귀한문화재39보령성주사지39 1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과 서회랑 사이 퇴적 층위 모습(북서에서)
▲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과 서회랑 사이 퇴적 층위 모습(북서에서)

보령 성주사지 금당지 전면 계단 및 기단 근경(동에서)
▲ 성주사지 금당지 전면 계단 및 기단 근경(동에서)

보령 성주사지 삼천불전지 중건기 강당지 전면 계단 모습(동서에서)
▲ 성주사지 삼천불전지 중건기 강당지 전면 계단 모습(동서에서)

지난주 '보령 성주사지'에 다녀와 사진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한 지인이 자신이 가진 자료 중에 참고가 될만한 것이 있는 듯하다며 사진 몇 장을 보내 주었다. 불빛이 다 새어 들어간 사진이었지만, 20여 년 전 성주사지의 모습을 살필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준 게 여간 고맙지 않았다.

보령 성주사지 전경
▲ 1984년 8월 13일 문화재로 지정된 '보령 성주사지' 전경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는 통일신라 선문 9산 중 최대의 절인 '성주사'가 있던 백제시대의 절터다.

선문 9산은 다음을 말한다. 가지산 보림사(전남 장흥), 실상산 실상사(전북 남원), 동리산 태안사(전남 곡성), 성주산 성주사(충남 보령), 사굴산 굴산사(강원도 명주), 사자산 흥녕사(강원도 영월), 봉림산 봉림사(경남 창원), 희양산 봉암사(경북 문경), 수미산 광조사(황해 해주)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창건된 '오합사(烏合寺)'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호국사찰이었다고 하며, 백제 멸망 후 폐혜가 된 것을 통일신라 말 낭혜 무염대사(郎慧 無染大師, 808~ 888)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천여 년 간 존속하다 임진왜란 이후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와 몇 기의 유물이 남아 있어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성주사지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②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9호
③ 성주사지 석계단: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④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물 제47호
⑤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30호
⑥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 제47호
⑦ 성주사지 석불입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⑧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국보 제8호

건물지 초석
▲ 건물지 초석

통일신라시대에 중창됐음에도 불구하고 평지 가람을 특징으로 하는 성주사지에서 가장 먼저 살펴본 건 초석이었다. 건물(門) 기둥을 받치는 초석 4개 중 3개만 남아 있었다. 사라진 한 개의 행방에 대한 안내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인터넷 검색으로도 그에 대한 기술은 찾을 수 없었다.

보령 성주사지 석등과
▲ 성주사지 석등(①)과 오층석탑(②)

사라진 초석 자리에서 바라보니, 성주사지 석등과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 석등'은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지붕돌 '옥개석'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진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불탑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 성주사지 오층석탑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것이라 하는데,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2중 기단 위에 5층 석탑이 올려져 있다. 백제 탑과 신라 탑의 양식이 혼합되었거나, 이 시기에 나타난 다양한 탑 양식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단다. 상륜부는 없어진 상태였다.

사자상
▲ 석계단의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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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에 이르렀다. 계단 양쪽에는 한눈에 봐도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었다. 1986년 도난당해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복원 당시만 해도 원형에 가까웠지만, 오랜 세월이 덧입혀진 것과는 사뭇 달라서 비가 오고 나서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석계단이나 복원한 사자상만으로도 원형의 정교함이 가히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기에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너무도 컸다.

본좌불 좌대
▲ 금당의 불상좌대(본좌불 좌대)

금당의 불상좌대에 있어야 할 본좌불은 보이지 않았다. 좌대의 크기로 가늠하건데,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보령 성주사지 삼층석탑들
▲ 금당지 뒤의 성주사지 삼층 석탑들

석탑에 새겨진 자물쇠 문양
▲ 성주사지 서 삼층탑에 새겨진 자물쇠와 고리 문양

성주사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하자면 첫째가 평지 가람이며, 둘째는 절을 돌담으로 두른 것, 마지막은 금당 뒤에 석탑 3개가 세워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례적이라 한다.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삼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는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①)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사적기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1층 몸돌에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새겼는데, 몸돌 안에 있는 사리공에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세 개의 삼층석탑 중 서쪽의 탑을 조사해 봤다고 하는데, 도굴된 탓인지 몸돌에서는 재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좌·우의 삼층 석탑들보다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②)이 검은색을 띠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탑은 반려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상륜부가 없어졌으며, 3개의 석탑 중 훼손이 가장 심한 것으로 보였다.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③)은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으며, 지붕돌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을 화려하게 보이게 했다고 한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금당 앞에 오층 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 후 석탑 3기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추가로 배치했다고 한다.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 성주사지 석불입상

3기의 3층 석탑 뒤로 보이는 성주사지 석불입상은 풍화가 심해 얼굴 모양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왼쪽 귀는 없어지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민불(民佛)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단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보수 공사 중으로 내부는 살펴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국보 제8호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를 살펴보고자 했으나, 보수 공사가 진행되는 관계로 내부를 살펴볼 수 없었다.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선문9산 중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명문장가 최치원이 왕영에 따라 문장을 짓고, 최인연이 해서체로 쓴 비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고승 탑비 중 최고의 비로 인정받는 국보를 보지 못해 돌아오는 내내 아쉬움이 남았지만, 성주사지의 남은 유물들을 통해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그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느낀 알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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