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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7월에 찾은 호국사찰의 충절과 의기

임진왜란 최초 승병과 의병의 넋이 살아 숨쉬는 금산 보석사

2021.07.09(금) 23:18:55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청남도 금산군은 공주시 계룡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과 연결된 충절과 의기인데요.

7월에찾은호국사찰의충절과의기 1

며칠 전 폭우가 그치고 흐린 하늘을 이고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건강한 인삼의 고장 금산의 자랑인 호국사찰 보석사를 다녀왔답니다.

보석사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의 제49대 헌강왕(재위:875~886) 11년인 886년 조구대사가 의선각을 세우면서 지금의 보석사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7월에찾은호국사찰의충절과의기 2

일주문을 지나 졸졸거리며 흐르는 실개천 옆의 길을 따라 가면 오른쪽으로 다리 건너 부도탑군이 자리하고 있더군요.

7월에찾은호국사찰의충절과의기 3

그런데...
오랜만에 찾아서 일까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장곡 스님이 보석사 주지로 있으면서 일으킨 불사인지 몰라도 범종각 아래도 드나들었던 출입구가 커다란 대문으로 막아 두고 돌계단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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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2011년 11월의 사진인데요.
2017년까지만 해도 이랬었는데 이번에 가니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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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에 붙어 있는 보석사의 현판인데 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다른 절집의 편액과는 달리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진규의 글씨 주변에 죽농 안순환의 대나무와 난초가 그려진 현판인데요.
혹시 조선말 편액을 새로 한 곳이라면 꼭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세요.
^^

7월에찾은호국사찰의충절과의기 6

보석사 대웅전은 1993년 11월 12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坐像)을 모셨습니다.

보석사라는 절의 이름이 상당히 특이하죠?
절 지으면서 앞산에서 나온 금으로 불상을 만들고 봉헌했기 때문에 보석사라고 명명했다는데 역사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어쩌면 임진왜란 때 불타면서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합니다.
조선말, 대한제국의 고종 때 명성황후 민비(閔妃)가 중창하여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금산군이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전국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북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던 위치에 있던 보석사는 1963년 금산군이 충청남도에 속하게 되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편성되었다는 것입니다.

7월에찾은호국사찰의충절과의기 7

보석사의 대웅전 왼쪽에는 일반 사찰의 경우 영원전이 있을 곳에 기허당이라는 진영각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영규대사와 휴정(休靜)·유정(惟政) 등 아홉 명의 선사영정을 봉안했다가, 영규대사의 위패는 칠백의총 종용사로 이전했고, 현재는 영규대사의 진영과 보석사를 세운 조구대사의 진영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보석사에 남아있는 당우는 대웅전·진영각·심검당·의선각·산신각·응향각·체실·요사채 등이 있으며 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 금산 보석사 대웅전, 시도유형문화재 제214호 금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시도문화재자료 제29호 금산 보석사 의선각, 천연기념물 제365호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가 선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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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아래로 나 있는 작은 출입문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 만나지는 보석사의 천년 은행나무의 모습입니다.

1990년 8월 2일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된 보석사 은행나무는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1135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 사는 나무로 병충해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요.
규모를 살펴보면 1그루의 은행나무이며 나무 주변 면적이 1,122㎡인데 가지 퍼짐은 동서 쪽으로 28m, 남북 쪽으로 29m에 나무 높이는 4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11m나 된답니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한국전쟁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매년 10월 보석사은행나무대신제보존회 주관으로 금산보석사은행나무대신제가 은행나무 앞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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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사 은행나무에서 숲길을 따라 입구 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에 작은 비각이 하나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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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지키고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승장 기허당 영규대사를 기리는 문화재자료 제23호인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가 들어 있는데요.
비각 속에 세워져 있는 진위장군 기허당 영규대사가 순국한 내용을 적은 이 비는 높이가 약 4미터에 달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자획이 뭉개지고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해방이 되자 정요신(鄭堯臣)이 찾아내 주민들이 나서서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기허당 영규대사는 공주 갑사의 청련암에서 수행을 하며 선장(禪杖 - 지팡이)으로 무예를 익혀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평소 건강을 위해 가르쳐 왔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3일 동안 크게 통곡을 한 영규대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승병 수백을 규합하여 관군과 함께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으로 진격해 옥천에서 궐기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기 위해 벌인 금산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창에 배를 찔리는 중상을 입고도 승병과 조헌과 의병을 죽음으로 내몬 공주에 있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을 단죄하기 위해 공주로 향했으나 현재의 계룡면 유평리까지 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현재 유평리에는 영규대사의 묘와 영정각이 있으며 계룡면 사무소 앞에는 영규대사 정려비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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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과 의기가 가득한 호국사찰 보석사는 많은 자랑거리 중에서 계룡도령 춘월이 꼽는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맑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자연으로 보입니다.
보석사 전체를 차근차근 둘러보아도 1시간 정도면 충분한 소박한 절집으로 코로나19 시대에 지치고 힘든 몸과 영혼을 달래주는 치유의 공간인 것 같습니다.


보석사 - 충청남도 금산군 보석사1길 30
보석사 은행나무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산 5
보석사 일주문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796
영규대사비각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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