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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봉준, 이 여름에 녹두꽃으로 다시 피어나다

태안 땅 곳곳에 스며든 동학혁명 이야기

2021.07.05(월) 16:25:00 | 나드리 (이메일주소:ouujuu@naver.com
               	ouujuu@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숨 막히는 여름은 식물들에게는 낙원이다. 7월 달에 맞이하는 '소서(小暑)'는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는 열한 번째 절기이다. 소서는 '작은 더위'를 뜻하는 말로 장마철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여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나무들의 우둔지 속에서 자글거리며 광합성 작용을 한다. 그리고 장맛비가 시작되면 식물들의 뿌리는 땅속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대지의 영양분을 흡수한다. 그렇게 활성화된 성장력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시기가 소서(小暑)이다. 그래서 7월의 여름은 식물들이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접어드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샘골마을에서 바라 본 백화산
▲ 샘골마을에서 바라 본 백화산

농촌의 여름은 유난히 덥다. 고추가 탐스럽게 열리고 있는 비닐하우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의 열기는 복사열로 변하여 비닐하우스 내부를 사우나처럼 덥게 만들고 있다. 뜨거운 열기는 비닐하우스 지붕에서 안개처럼 사방으로 피어난다. 희뿌연 비닐하우스 속에는 농민들의 구슬 같은 땀방울이 대지로 떨어질 뿐, 고요하기만 하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은 인간들의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위한 것이다.

밭에는 녹두가 꽃을 피우고 있다
▲ 밭에는 녹두가 꽃을 피우고 있다

뚜렷한 사계절이 있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자랑하던 우리나라도 인류 문명의 이기주의를 피해갈 수 없다. 계절의 경계는 애매해지고 계절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인류가 자연환경을 파괴한 만큼 자연도 인류의 생존을 파괴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고집스러운 탐욕으로 스스로 죽음의 전쟁을 경고하고 있다. 정치적인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국가 간의 전쟁을 위한 핵폭탄을 비축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자멸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추모비가 있는 주변 길
▲ 동학농민혁명추모비가 있는 주변 길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들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 가능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한 인류의 생존은 자연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여름이 덥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들의 이기주의와 편리주의에 기인한 문명 탓이다. 수만 년 전, 전기가 없던 시절에도 여름은 있었고 지금처럼 태양빛이 지구의 대지에 쏟아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자연의 변화에 잘 적응하고 순응하던 인간들이, 문명의 발전을 이루면서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공사 중인 동학농민기념관 중앙홀에서 본 하늘
▲ 공사 중인 동학농민기념관 중앙홀에서 본 하늘

백화산 자락의 작은 텃밭이 평화롭다. 밭을 매고 있는 아낙네의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에 녹두꽃이 피었다. 녹두의 연두색 꽃잎이 아낙네의 땀방울에 투영되다가 뚝뚝 떨어진다. 커다란 쌍떡잎에 가려져서 소심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린아이가 야무지게 쥔 주먹을 살짝 펴 보이는 듯 꽃잎들이 옹골차게 보인다. 황토흙에 초록의 줄기를 세우고 있는 녹두꽃을 보니 '녹두장군 전봉준'이 생각난다. '전봉준'은 조선시대 농민 출신의 천민이었는데 조정과 양반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하는 농민들을 규합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다.

옹골찬 녹두꽃의 모양이 애잔하다
▲ 옹골찬 녹두꽃의 모양이 애잔하다

전봉준의 키가 녹두처럼 작다고 하여 녹두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려면 사람의 키가 녹두처럼 작을 수 없지 않는가? 아마도 녹두꽃 연노랑의 애잔한 색상과 농민들의 고달픈 생활이 닮아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동학혁명은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듯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조선 26대 왕 고종 31년(1894)에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발생하자 조정은 일본과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일어났고,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하는 ‘경술국치’를 겪는다. 그리고 25년 뒤 1919년 1월 23일에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했던 일본인에 의해 고종은 죽음을 맞이한다. 동학혁명으로 인하여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은 뼈아픈 일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망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추모비
▲ 동학농민혁명추모비

충남 태안군의 주산인 백화산은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태안초등학교 뒤 편 백화산 등산로에는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농민들의 뜻을 기리는 '동학농민혁명 추모비'가 있다. 백화산 산수길 제4코스이며 정상과의 거리는 900m 정도이다. 기념비 위쪽에는 '교장(校長)바위'라고 불리는 넓적한 자연석이 있다. 이 바위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 가정에 돌을 던지다가 잡혀간 학생들을 일본인 교장이 보증을 하고 모두 석방시켰는데, 그 교장이 이 바위에 자주 올랐기 때문에 학생들이 교장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바위는 원래 교살바위라고 불렀다. 교묘하게 미화시키는 일본의 속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교장바위'에서 일본군인들이 동학농민혁명군들을 목 졸라 죽이고, 때려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총살을 시켰던 곳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들의 붉은 피가 ‘교장(絞杖)바위’에서 추모비까지 흘러 계곡에도 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이제라도 학교의 교장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교장(絞杖), 혹은 교살바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교살(교장)바위에서 바라 본 동학농민혁명추모비
▲ 교살(교장)바위에서 바라 본 동학농민혁명추모비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유교 정책은 공자의 가르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책이었다. 고려 말기의 불교가 국가를 혼탁하게 하는 원인이 되자 반면교사로 ‘숭유억불’ 정책을 실행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사상의 핵심인 삼강오륜을 조선의 근본으로 삼았지만 양반과 천민의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기득권자들의 횡포는 조선의 법도를 무너뜨렸고, 민초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면서 동학혁명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시작이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추모탑 곳곳에 동학혁명군의 혼이 담긴 한자가 적혀있다
▲ 추모탑 곳곳에 동학혁명군의 혼이 담긴 한자가 적혀있다

동학혁명 당시를 짐작하게 하는 글을 보면 황당하기만 하다. “가렴주구(苛斂誅求)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 백지징세(白地徵稅)” 즉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명목에 죽은 사람과 어린애는 물론 빈 땅에도 세금을 물렸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왕조 5 백여 년 동안 기득권의 착취와 횡포로 인하여 배고픔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여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반감이 폭발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 된 것이다.

동학혁명 전래비
▲ 동학혁명 전래비

북접일기를 보면 1893년 3월 11일에 충북 보은에서 시작하여 1894년 10월 1일 기포에서 동학혁명이 끝날 때까지 태안의 동학혁명 활동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전국 동학혁명의 참여자가 3,644명 정도인데, 이 중에 충남지역 참여자는 816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816여 명 중에 태안지역에서 동학혁명에 참가한 인원이 129명으로 홍주 127명, 공주 112명, 서산 108명, 천안 91명보다 많을 정도로 충남에서는 태안지역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다.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피제지비
▲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피제지비

태안의 동학은 읍내 장현리에 사는 최형순(崔亨淳)이 경주로 시제를 지내러 다니면서 ‘최시형’으로 부터 동학을 배워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을 계기로 훗날 태안의 동학혁명은 조석헌 문장준의 “북접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이 “북접일기”는 전국의 동학운동 기록 중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의 하나로 일찍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기록 등에 의하면 1894년 9월 그믐날 아산 포구를 떠난 동학 혁명군 선단이 원북 방갈리 학암포에 닻을 내리고 이를 기다리던 태안 동학도들이 밤새 소리 없이 걸어서 백화산에 숨어들었다.

문원덕 선생 공덕비와 동학농민군의 추모비
▲ 문원덕 선생 공덕비와 동학농민군의 추모비

이튿날 10월 초하루, 장터에 모여든 성난 동학도들이 옥에 갇힌 30여 명의 동학도들을 구출하고 군수 신백희와 순무사 김경제를 비롯, 아속들의 목을 내리쳤다. 태안 관아가 함락되던 날 이웃 서산에서도 군수 박정기, 아전들이 참수되었다. 10월 22일 태안 동학군은 서산을 경유, 해미 귀밀리에 진을 치면서 동학 봉기 가담자가 급격히 불어나자 사기가 충천되었다. 해미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儒會軍)에게 죽창과 쇠스랑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크게 타격을 입고 패하여 이때부터 쫓기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의 격전지였던 백화산 자락
▲ 동학농민군의 격전지였던 백화산 자락

태안 백화산으로 몸을 피신한 혁명군은 진압군과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의 습격을 받은 동학군은 백화산 교장(絞杖)바위 위에서 처형당했는데, 핏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고 시신은 골짜기에 가득했다고 한다. 백화산에서 피신한 동학군 일부는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에서 소 여물을 썰 때 사용하는 작두로 목이 잘려서 희생되었다. 일본군과 연합작전으로 동학혁명군을 소탕한 연합군의 잔혹함에 소름이 끼친다. 그 참혹한 역사적 증거물인 작두 같은 유물들이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동학혁명추모비에서 바라 본 공사중인 동학혁명기념관
▲ 동학혁명추모비 아래에서 바라 본 공사중인 동학혁명기념관

태안군에서 건립 중인 '태안동학농민기념관'이 개관되면 작두와 함께 자료들을 반환받아서 수룡리 토성산에서 목이 잘린 농민혁명군들의 원혼을 달래 주어야 할 것이다. 동학혁명 사상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뜨거운 외침이다. 허름한 길가의 작은 녹두밭에서, 불공평과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싸우던 조선시대 농민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태안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공사중이다
▲ 태안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공사중이다

역사의 시간은 사실적 교훈과 잇닿아 있다. 127년이 흐른 지금,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죽었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태안시내는 무심하게도 평화롭기만 하다. 동학농민군들이 흘린 핏물이 흐르던 계곡은 맑은 시냇물이 졸졸졸 거리며 흐르고 있고, 뜨거운 핏물을 빨아들이던 대지에는 예쁜 꽃들이 가득하다. 동학농민혁명군들의 시체를 받쳐주던 바위들만이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지금의 모습에서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잔혹함을 엿볼 수 없다
▲ 지금의 모습에서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잔혹함을 엿볼 수 없다

선조들의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백화산 자락에도 127번째 여름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곳 여름이 그려내는 초록의 풍경들은 다른 숲에서 볼 수 없는 숙연함이 묻어난다. 숙연함이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내려가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공사 중이다. 한 걸음으로 뛰어갈 수 있지만 발걸음이 늘 조심스럽다. 숙연함 속에 애잔함이 가득하니 그런 것 같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노랫말처럼.

동학농민혁명기념과 중앙 홀 모양
▲ 동학농민혁명기념과 중앙 홀 모양

동학혁명추모비에서 새로 건립되고 있는 동학혁명기념관까지 거리는 200m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녹두꽃이 떨어질까 가슴 졸이는 청포 장수의 발걸음으로 걷다 보면 10여 분 거리이다. 입으로 노랫말을 불러보지만 가슴은 먹먹하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실된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과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선조들의 피울음을 머금은 새소리가 슬프게 머리를 흔들고 있다. 동학혁명기념관에 도착하니 아직도 공사 중이다. 기념관 중앙에 뻥 뚫려있는 원형 모양이 이채롭다. 원형으로 다가오는 푸른 하늘이 이유 없이 무겁고 슬프게 느껴진다.

충남 화이팅 !! 태안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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