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여행

코로나19가 사라지는 기쁜 선물을 받고 싶어요!

강경여행의 의미를 더하는 기독교 성지순례코스

2020.12.24(목) 12:48:45 | 황토 (이메일주소:enikesa@hanmail.net
               	enikesa@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
 
교회건물 입구에 세워진 대형트리가 성탄절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바닥엔 크기가 다른 선물박스와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인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모양이 어울려있다. 저 선물박스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1
  
1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언니를 따라 '미국교회'라고 불리는 곳에 간 기억이 있다. 50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 난생처음 외국인을 만난 것이다. 우리가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던 젊은 청년은 하얗고 투명한 얼굴에 오뚝 박힌 코, 시종일관 미소 띤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 미국교회라는 데가 신기하기만 했는데, 선물로 받은 사탕과 초콜릿은 정말이지 여살 살 인생의 강력한 문화충격이었다. 단맛의 유혹은 지금도 즐기는 편이지만 달콤함에도 차원이 있다는 걸 막연히 깨달았던 것 같다.
 
그 시절, 사탕이란 건 집에서 제사 지낼 때마다 먹는 동글납작한 모양에 붉고 하얀 줄무늬가 있던 게 내가 경험한 전부였다. 게다가 그 사탕은 어린아이의 한입에 넣기엔 너무 컸다. 그걸 먹으려면 옆에서 엄마의 튼튼한 이가 필요하거나 막대 같은 걸로 충격을 가해 여러 갈래 쪼개진 조각을 집어먹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어쩌면 사탕으로 시작된 나와 기독교와의 만남. 많은 시간이 지났고 살면서 지난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고 다시 제대로 아는 게 필요했다. 그때 교회에서 만난 미국교회 전도사님은 선교사로 파송된 분이었으리라.
 
1
 
1
   
이곳 강경 기독교 성지순례코스의 알림글을 읽으며 교회의 성탄트리 앞에서 ‘라떼’의 소소한 추억을 소환하자니 감회가 새롭다. 강경은 기독교 성지순례코스가 따로 있다. 더구나 대한민국 ‘최초’의 역사적인 장소가 있기에 근대역사와 문화에 의미를 더한다.

강경은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도 강경은 금강의 지류가 합류하여 서해로 연결되는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평야지대였다. 대한제국 시기엔 수상교통을 바탕으로 충남 공주와 부여, 장항, 군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백제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강경은 지역 특성상 중국에서 뱃길로 한반도에 닿는 곳이다. 금강으로 수산물이 유통되고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이 전해졌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교육이 필요했다. 강경 제일감리교회는 ‘1901년 덕유정에서 예배를 시작, 1908년 윌리엄 선교사에 의해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인 만동학교를 세워 애국애족 정신을 가르쳤다. 1921년 5월 지역 최초 유치원을 설립했고, 1961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강성 중학교를 설립했다.’ 강경제일감리교회는 지역과 함께하였고 특별히 교육에 대한 관심과 총력을 다해 인재 양성에 노력한 교회로 알려졌다. 
  
1
▲황산초등학교 맞은편 교회의 펼침막 '힘내라 대한민국 함께 이겨냅시다'
 
교회 건물이 있는 다른 공간엔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다. 코로나 상황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다. 특별히 방문을 원한다면 들어갈 수 있다고 연락처가 적혀 있었지만 혼자 전시를 관람하기엔 시간도 날씨도 편치 않았다. 내가 굳이 관람한다면 교회직원이 시간을 내야 되기에 이후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모임의 회원들과 같이 관람하기로 했다.
 
1
   
1
▲근대역사전시관의 펼침막
 
교회가 있는 맞은편에는 황산초등학교가 있다. 길을 건너 초등학교에서 전시관 건물을 바라보니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였던 선생은 일제가 무단정치를 시행하면서 민족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가할 때, 1911년 5월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역사서를 집필했다. 민족혼을 진작할 목적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1925년 11월 66세의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했다.
 
‘발해의 역사를 아우른 고려가 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하더라도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했으니 나라가 형체라면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정신이 살아있으면 형체도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백암 박은식
 
1
▲강경황산초등학교
 
1
▲산교육의 장소가 되는 이곳, 강경제일감리교회와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는 곳을 아이들이 지나고 있다
 
반일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선생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10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선생의 글에 잠시 숙연했는데 초등학생 셋이 길을 지난다. 아이들에게 저 글은 절로 교육이 되는 말없는 가르침이 될 것이라 여긴다. 잠시였지만 근대와 현대가 교차된 시간이었다.
 
성탄트리가 있는 교회 본당 건물은 마을의 나직나직한 건물들 사이에서 우뚝 서 있다. 십자가가 쌍으로 마주한 뾰족탑 하늘 위로 눈이 내릴 것 같다. 산타가 눈썰매를 타려면 지금부터 펑펑 내려야 하는데 말이다. 선물박스의 끈을 풀면 어떤 선물이 나올까. 믿음, 소망, 사랑도 좋지만 끈이 풀리는 순간, 코로나19가 사라지는 선물을 받고 싶다.
 

황토님의 다른 기사 보기

[황토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