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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지역 3·1운동 100주년(4)

아산지역 3.1운동 참가자 5000여 명, 대부분이 농민

2018.08.09(목) 09:17:26 | 온양신문 (이메일주소:ionyang@hanmail.net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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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지역의 3·1운동은 311일부터 15일까지 4일 간 제1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이어 331일부터 44일까지 5일 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이에 참가한 인원은 약 5천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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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 명의 참가자들 가운데 현재 인적 사항이 파악되는 인사는 각 면에 소장된 범죄인 명부와 국가기록원의 판결문을 통해 확인되는 290명이다. 즉 온양면 18, 송악면 41, 염치면 2, 영인면 17, 선장면 115(순국자 최병수 1명 포함), 도고면 80, 신창면 16, 인주면 1명 합계 290명의 인적 사항이 확인된다.

거주별로 보면
온양면의 법곡리, 신인리, 용화리, 읍내리, 좌부리 등 5개 마을, 송악면의 거산리, 궁평리, 동화리, 송학리, 역촌리 등 5개 마을, 염치면의 백암리 1개 마을, 영인면의 신운리, 신화리 등 2개 마을, 선장면의 가산리, 군덕리, 대정리, 돈포리, 선창리, 신덕리, 신동리, 장곳리, 홍곳리, 대흥리, 신성리 등 11개 마을, 도고면의 기곡리, 덕암리, 도산리, 석당리, 시전리, 신유리, 신언리, 오암리, 화천리 등 9개 마을, 신창면의 읍내리 1개 마을, 인주면에 동흥리 1개 마을 합계 8개 면의 35개 마을 인사들이다.

온양면에서는 읍내리
, 좌부리 인사(18명 중 13), 송악면에서는 궁평리, 동화리 인사(41명 중 29), 선장면에서는 돈포리, 신동리, 신덕리, 가산리, 대정리 인사(114명 중 77), 도고면에서는 시전리, 신유리, 덕암리 인사(80명 중 51)들이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연령별 분포를 보면
, 1016, 20120, 3086, 4048, 5013, 60대가 2명이며 확인되지 않는 인사가 4명이 있다. 20대가 120명이고 30대가 86명으로 20~30(206)가 전체 289명 가운데 미확인 4명을 제외한 285명을 기준으로 72.28%에 해당된다.

또한
20대와 30대를 연령별로 분석한 결과 20대는 25~6세가 41, 30대는 30~2세가 45명으로 가장 많았다. 즉 아산지역의 3·1운동은 20~30대가 주도적으로 참가하고 그 가운데 20대 중반과 30대 초반의 연령들이 적극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참가자들의 신분을 보면
, 우선 학생들이 아산지역의 3·1운동 초기 단계를 주도했다.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인 311일 독립운동은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이어 312일에 온양시장에서 30명의 학생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314일에도 학생 100여 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331일 염치 방화산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복희는 이화학당 학생이었고, 43일 영인에서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학다리까지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종교인들의 주도하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 314일 온양시장에서 지역민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현창규는 천도교 도사인 권병덕의 지시를 받고 귀가한 인물이고, 44일 선장의 군덕리 시장에서 만세운동과 헌병주재소 공격을 주도한 정수길은 천도교에 입교한 인물이었다. 314일 영인 아산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인사들은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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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염치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복희는 백암교회의 신자로 교회가 설립한 영신학교 여교사 한연순과 협의하고 교회의 장로인 김상철의 협력과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42일 영인의 횃불독립만세운동도 예수교 신자들이 주도했다.

양반들의 참여도 있었다
. 범죄인 명부의 족칭(族稱)’란에 양반으로 기재된 인사로, 송악면 범죄인 명부 41명 중 17(41.66%), 영인면 17명 중 4(23.53%), 도고면 80명 중 1명이 양반이었다. 송악면의 경우 궁평리 16명 중 8(50.00%), 동화리 13명 중 6(46.15.%), 송학리 2명 중 2(100.00%), 역촌리 2명 중 1(50.00%)이 양반이다.

연령대 별로
101, 207, 305, 402명이다. 20대가 41.18%이고 30대를 합쳐 2~30대가 70.59%이다. 따라서 송학면 횃불독립만세운동은 동화리, 궁평리의 20~30대 양반층의 주도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인면의 경우
4명이 모두 신화리에 거주하고 신화리에 7명 중 4(57.14%)이다. 영인면은 신화리의 양반들이 주도해 앞마을 신원리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친 것으로 보인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 가운데 농민 외의 인사가
3명이 있다. 331일 염치 횃불독립만세운동에서 한연순은 영신학교 여교사로서 활동하다가 김복희와 함께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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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신창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진화(35)인력거부(人力車夫)’였다. 그는 본적인 선장면 신성리에서 신창면 읍내리로 이주해 인력거를 끌며 생활하다가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44일 선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오상근(36)은 돈포리에서 고인(雇人)’으로 농사일을 거들면서 잡다한 노동을 한 삯으로 생활을 했다.

이 외 참여 인사로 한금동
(韓今同, 23)은 영인면 신화리에서 일가(日稼)’로 품팔이를 하면서 생활했다. 둔포면 운용리에서 일본인 광혈 20여 개소를 공격, 파괴한 인사들은 광산 노동자로 추론된다.

아산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참여한 대부분의 인사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이었다. 참가자 인적사항이 확인되는 289명 가운데 교사, 학생, 인력거부, 고인 및 미기재 인사 등 13명을 제외하면 276명이 농민이다.

1차 아산지역의 3·1운동을 이끈 인사들에는 학생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나,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절정기를 이룬 3월 하순에 전개된 제2차 아산지역의 3·1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이 주도하고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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