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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아산지역 3·1운동 100주년(3)

최초의 독립만세운동 온양공립보통학교

2018.08.05(일) 18:31:47 | 온양신문 (이메일주소:ionyang@hanmail.net
               	ionyang@hanmail.net)

아산지역31운동100주년3 1



아산지역의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한 세력과 직접 연결돼 추진되지 않았다. 하지만 온양의 현창규가 천도교 중앙 총부 권병덕의 지시를 받고 귀향했고, 염치의 오봉환이 고종의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서를 구해 귀가했으며,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었던 김복희도 서울의 3·1운동 후 310일 휴교령에 의해 귀가하면서 3·1운동이 아산에 전해졌다

따라서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서울과 인근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전개됐다

최초 독립만세운동 온양공립보통학교
아산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은 3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 독립만세를 고창한 것이다. 이에 일본인 교장 구로기 요스게(黑木儀壽圭)가 즉시 학생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하도록 회유하며 강압적으로 제지했다.

일단 학생들은 학교장의 강요된 회유에 자진해 해산을 했지만 다시 군중들이 모이는 온양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에 주목한 온천리 헌병분견소 헌병들은 사전 탐지와 정보를 얻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물리적으로 제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3123학년과 4학년들은 예정대로 학교에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교를 하고 온양시장으로 집합했으며 오후 230분경 학생 30여 명이 시장에 있던 군중 2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314일에도 학생 100여 명이 온양시장에서 구한국국기’(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또한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참가했으며 권병덕의 권유를 받고 귀향한 현창규는 서만수, 권태원, 김치삼, 이성구, 방장근, 박장영 등 면민들과 함께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배부하면서 이날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315일에도 100여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16일 후인 41일에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영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영인에서는 314일에 처음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오후 1시 공세리에서 천주교 교도 약 15명이 옛 아산 구읍인 아산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장 군중들도 만세를 부르며 합세했다. 헌병들은 주도 인사를 체포하고 만세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오후
6시경 다시 구읍 아산리 밖에서 신화리와 신운리 주민들 중심으로 수백명의 주민들이 집결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아산리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를 통보받은 온양 헌병분견소에서는 수비대 병력과 헌병들을 급파해 제지하며 경계 활동을 강화하므로 독립만세운동은 진정됐다.

그러나
42일 또다시 대규모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오후 8시 영인산에서 횃불을 올리는 것을 신호로 아산리에서 기독교인 주도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상성리 뒷산 대흥당, 신운리 뒷산 형제봉, 백석포 뒷산, 성내리(안골) 뒷산에서 각각 마을 주민들이 산에 올라 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43일에는 아산보통학교 학생 이세영, 김일수 등이 수십 명의 학생들과 함께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읍내로 나아가 아산리 시장을 거쳐 학다리까지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신창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신창에서는 318일 박민성이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권유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오후 1시쯤 신창시장에서 조명원, 이상규를 만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했고, 이어 공립보통학교 학생인 김안기에게도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만세운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헌병에게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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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에는 온양, 배방, 탕정, 염치, 둔포면 면민들과 함께 오후 8시경 각 마을 주위의 산 위에 올라 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42일에는 이덕균이 박진화, 정윤흥, 김양순, 김금복, 강순화, 손천일, 김원배, 송일상, 이상균, 김학삼, 김상준, 신흥남, 이창균, 강복개 등과 함께 오후 8시경 읍내리, 오목리 주민 약 200명을 이끌고 학성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를 외친 후 이덕균이 독립 연설을 하고 관청을 파괴하자고 주창을 하자, 만세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했다.

만세 군중들은 학성산을 내려오면서 돌을 주워 가지고 먼저 신창면사무소로 갔다
. 면사무소에서 정윤흥 등의 주도하에 군중들은 돌을 던져 문짝 2개를 파손시켰다. 이어 오후 9100여 명의 군중들은 신창헌병주재소로 이동했다. 15명은 주재소 정문 안으로 들어가서 돌을 던져 문등(門燈), 유리창 등을 깨뜨렸다.

오후
10시경에는 박진화, 강순화, 손천일, 김금복, 김양순 등 4~50명이 신창공립보통학교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교장인 일본인 종방교(宗方喬)는 군중들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지 말라며 제지하고 나섰다. 만세를 외치는 군중과 이를 제지하려는 학교장 사이에 시비가 일어났다. 그러자 박진화가 먼저 학교 건물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군중들도 학교 건물과 교장 관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 272장과 문짝 4개를 파괴시켰다.

이 독립만세운동에서 강달성은 학성산 봉화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이어 면사무소
, 헌병주재소, 보통학교에서 선두에 서서 군중들을 이끌고 투석하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선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선장에서는 44월 정수길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등과 함께 독립선언 발표를 성원하기로 협의하고 시장에서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했다.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이들은 오후 3시경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과 함께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다. 만세 군중들은 주재소의 건물과 창을 향해 돌을 던지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주재소로 진입하려 하자 헌병이 총을 쏘아 최병수가 순국했다.

염치에서의 독립만세운동
탕정, 배방, 염치 등에서는 331일 오후 8시에 각 면의 마을 주민들이 50여 개소의 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염치 백암리에서는 이화학당 학생 김복희와 영신
(永信)학교 여교사 한연순이 주도했다. 김복희가 휴교령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한연순을 만나 서울 3·1운동 상황을 전하고 마을 유지들과 협의했다. 이어 마을 백암교회의 장로 김상철이 적극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했다.

이들은 해가 진 후 어두워지자
, 마을 북쪽 방화산 위로 올라가서 주민 약 20명과 함께 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온양 읍내에서 출동한 헌병들이 산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므로 만세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김복희와 한연순도 피신했다.

한편 중방리에서는 오봉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가한 후 박동은과 상의하고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함께 마을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

그 밖의 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
41일에도 탕정, 배방, 염치의 3개면과 전술한 온양, 신창 이외 둔포에서도 오후 8시경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탕정에서는 현재 명암
2, 장무기 마을 서남쪽 산줄기 새매에서 마을 주민들이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특히 둔포에서는 운용리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후에 일본인 소유의 광혈
(鑛穴)로 가서 파괴한 곳이 20여 개소나 됐다.

그리고
42일과 3일 양일간에 걸쳐 아산지역 12개 면의 각 마을에서 주민들이 오후 8시 마을 부근 산 위에 올라가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인주의 공세리와 걸매리, 둔포 등의 해안 지역에서도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송악에서는
42, 3일의 아산지역 군내 각 면에서 전개한 횃불독립만세운동 때 궁평리, 동화리, 거산리, 역촌리. 송화리 등의 마을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도고면에서는
44일 선장의 군덕리 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기곡리, 덕암리, 도산리, 석당리, 시전리, 신유리, 신언리, 오암리, 화천리 등 마을 주민들이 참가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상과 같이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시작으로 312, 14, 15일에 걸쳐 학생들의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참여해 온양 읍내와 영인에서 주로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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