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독립기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유관순 열사는 독립운동가로 천안 목천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에 재학 중 3·1운동을 맞아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여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우내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이러한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는 봉화지와 함께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고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싸리나무로 만든 대문으로 들어가자 소담하지만 단정해 보이는 ㄱ자형의 초가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방, 건넌방, 부엌 등으로 이루어진 유관순열사 생가지의 안방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논의하는 모습과 함께 건넌 방에서는 사촌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는 모습 등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두어 3.1운동 당시의 생생함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 했습니다.
또 부엌에서는 가마솥과 함께 아궁이에 불을 떼는 모습과 장작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 구조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문화교육의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가지 밖으로 나오면 오른편으로 박화성씨가 시를 짓고, 이철경씨가 글씨를 쓴 기념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가 왼편에 위치한 매봉교회는 유관순 열사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이 교회를 다니며 신학문을 접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고 합니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총명함을 눈여겨보고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했던 선교사 샤프 부인을 만난 곳이기도 하기에 유관순 열사에게는 더욱 의미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매봉교회는 만세운동 이후 일제에 핍박을 받아 폐쇄되었다가 유관순열사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창립 80주년을 기념하여 재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식 건물로 단정한 모습의 매봉교회를 볼 수 있었고 지하 1층에 유관순열사의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또 매봉교회 맞은편으로는 유관순 열사 동생인 유인석씨의 가족이 생가를 관리하면서 거주했던 기와집을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