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의 제실입니다.
차를 입구에 세우고 면암 선생의 비문과 묘 아래에 있는 제실로 가보았습니다.
면암의 묘가 논산에 안장된 후에 참배객이 많아지자, 1910년에 일제의 명령으로 멀리 떨어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411번지 예당저수지 근처에 묘를 이장하였습니다. 최익현이 죽은후에도 일본 이토히루부미는 "조선의 수군 3만보다 면암이 더 무섭다" 라고 하였습니다. 최익현의 대쪽같은 성품으로 임병찬이 쓴 대마도 일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학의 거봉 최익현은 항일의 선봉이 되었고 그의 충효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내렸습니다.
"면암은 74세의 최고령으로 항일 의병장으로 나서며 권력앞에 굴복하지 않는 대쪽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나 최익현은 충성을 다해 나라의 환난을 미리 막지 못하고 또 몸을 던져 순국함으로써 민기를 북돋우지도 못하였으니, 너무 부끄러워 살면서 수천만 동포를 대할 수 없다. 이에 감히 포고로써 호소하노니 나라 안 동포들이여 바라건대 이를 죽어가는 늙은이의 말이라 흘려버리지 말고 부디 우리 모두 스스로 힘내고 굳게 다져서 우리의 인종마저 바꾸려는 저들의 악랄한 간계를 눈뜨고 볼수가 없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듬해 1906년에 최고령 의병장으로 전북정읍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고 항일의병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역사의 종묘사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행을 함게 하겠는가?"
1894년 갑오개혁 후에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들어서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면암은 74살의 나이에 유학자가 아닌 의병장이 되어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는데 앞장섰습니다. 조선의 건국이래 유교적 관습이 무너지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면암은 유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면암의 재실은 묘소앞에 있으며 1909년 논산에 있던 면암 선생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민가를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최익현 선생 재실은 살림집을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는 'ㄱ'자형과 일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ㄷ'자 형으로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안채의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안방의 전면 부엌 2칸을 돌출 시켰으며 중심에는 대청의 전면 2칸과 1칸의 모서리 마루가 있습니다.
건너방은 서쪽에 있으며 일자형 사랑채는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로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2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방이 있으며누마루가 측면에 있습니다. 건축 구조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조선시대후기 건축물입니다.
1876년(고종13)년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본의 강압에 따라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듬해 1906년에 최고령 의병장으로 전북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고 항일의병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역사의 종묘사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행을 함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