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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항일의병의 거장 최익현 선생

2016.03.07(월) 11:51:26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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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응봉면에서 광시 쪽으로 가다보면 우측 나지막한 동산에 자리 잡은 언저리에 작은 묘소와 조선시대 기와집 형태의 제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로변에 높게 세운  '면암 최익현' 묘 간판이 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조선시대 암울했던 시대 항일운동을 펼쳤던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익현 묘소와 제실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충신이었던 최익현 선생(1833~1906)은 경기 포천출신으로 14세 때 성리학자 이항로의 제자가 되었고 74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대마도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셨습니다.
 

항일의병의거장최익현선생 2면암 최익현의 제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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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입구에 세우고 면암 선생의 비문과 묘 아래에 있는 제실로 가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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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앞에 서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동부승지와 호조참판을 지낸 면암 최익현은 고종 10년, 1873년 경복궁 중건과 원납증 발행으로 인한 재정파탄 등을 이유로 10년간 섭정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그 이후, 왕의 아버지인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최익현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면암은 이곳에서 유학자인 이기온과 도학자 안달삼 사학자 김희정을 만나 학문적으로 큰 발전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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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난지 1년도 되지 않아 1876년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로 들어와 개방과 통상을 강요하자,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격렬한 상소를 고종에게 올립니다. 이런 이유로 면암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3년간의 옥살이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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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우리나라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면암 최익현은 그의 아들과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안과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과 맞서 대항 했습니다. 체포된 면암과 아들 임병찬 등 12명은 일본군에 의해 모두 대마도로 압송되었습니다.  대마도 감금 3년형을 받은 면암은 왜놈이 주는 밥은 먹지 않겠다고 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등 항일정신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1907년 1월 1일 한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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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수젠지, 수선사에서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둔헌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후에 1월 6일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이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들과 백성들이 나와 맞이 하였으며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였습니다. 상여를 운구하는 곳마다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백성들 때문에 하루에 10리밖에 운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만에 논산 상월면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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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의 묘가 논산에 안장된 후에 참배객이 많아지자, 1910년에 일제의 명령으로 멀리 떨어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411번지 예당저수지 근처에 묘를 이장하였습니다. 최익현이 죽은후에도 일본 이토히루부미는 "조선의 수군 3만보다 면암이 더 무섭다" 라고 하였습니다. 최익현의 대쪽같은 성품으로 임병찬이 쓴 대마도 일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학의 거봉 최익현은 항일의 선봉이 되었고 그의 충효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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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은 74세의 최고령으로 항일 의병장으로 나서며 권력앞에 굴복하지 않는 대쪽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나 최익현은 충성을 다해 나라의 환난을 미리 막지 못하고 또 몸을 던져 순국함으로써 민기를 북돋우지도 못하였으니, 너무 부끄러워 살면서 수천만 동포를 대할 수 없다. 이에 감히 포고로써 호소하노니 나라 안 동포들이여 바라건대 이를 죽어가는 늙은이의 말이라 흘려버리지 말고 부디 우리 모두 스스로 힘내고 굳게 다져서 우리의 인종마저 바꾸려는 저들의 악랄한 간계를 눈뜨고 볼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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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듬해 1906년에 최고령 의병장으로 전북정읍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고 항일의병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역사의 종묘사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행을 함게 하겠는가?"

1894년 갑오개혁 후에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들어서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면암은 74살의 나이에 유학자가 아닌 의병장이 되어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는데 앞장섰습니다. 조선의 건국이래 유교적 관습이 무너지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면암은 유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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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의 재실은 묘소앞에 있으며 1909년 논산에 있던 면암 선생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민가를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최익현 선생 재실은 살림집을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는 'ㄱ'자형과 일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ㄷ'자 형으로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안채의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안방의 전면 부엌 2칸을 돌출 시켰으며 중심에는 대청의 전면 2칸과 1칸의 모서리 마루가 있습니다.

건너방은 서쪽에 있으며 일자형 사랑채는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로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2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방이 있으며누마루가 측면에 있습니다. 건축 구조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조선시대후기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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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13)년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본의 강압에 따라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듬해 1906년에 최고령 의병장으로 전북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고 항일의병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역사의 종묘사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행을 함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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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 최익현은 비록 유학자였지만, 1876년에 문하의 유생들과 함께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이유는 일제의 침략 야욕에 대항하여 유학자로서 의병을 일으켜 민족의 자존심 위한 유학자의 양심을 건 애국심의 발로였습니다. 마지막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던 봉수산의 정상에 있는 임존성이 바라다 보이는  면암의 묘소에서 바라본 석양은, 마치 면암 최익현이 74살의 고령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뜨거운 열정이 노을빛이 되어 번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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