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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이삼장군고택서 느끼는 한옥의 멋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 7호로 장군의 위엄 그대로 보존

2015.10.26(월) 13:11:43 | 설화 (이메일주소:ullallas2@naver.com
               	ullallas2@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삼장군고택서느끼는한옥의멋 1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32번 국도를 따라 가다 계룡산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동쪽방향으로
상월리로 가는 길에 접어들면 들판을 지나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 안에 마을이 하나 나타납니다. 

윤증 고택에서 불과 4km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주곡리로, 우리말로는 ‘술골’이라 불립니다.
다시 말해 ‘술익는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주막리’로 불렸는데 후에 주곡리로 바뀌었습니다.
 

이삼장군고택서느끼는한옥의멋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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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가옥답게 계단을 통해 올라가고 그 위에 우뚝 솟은 대문이 있어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고택 앞에 서니 듬직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드리우고 있었는데요.
이 은행나무는 이삼장군님이 생전에 말고삐를 메어두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삼장군고택서느끼는한옥의멋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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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고택에서는 옛 사람들의 집에 대한 철학과 지혜가 담긴 공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삼고택은 1985년 12월 31일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 7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이삼(1677-1735)장군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워 함은군에 봉해지면서 건립비가
하사되어 졌다고 합니다.

장군은 조선 영조 때의 무관으로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 경종 때에는 포도대장을 지내고 영조 원년에는 어영대장을 지내다가 당쟁과
관련해 귀향했다가 나중에 훈련대장이 되었습니다.
 

이삼장군고택서느끼는한옥의멋 6


고택 앞 마당을 거닐며 편안하고 고즈넉한 멋에 취했습니다. 위 사진속 계단 위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저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채인데 이 날 아쉽게도
안채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고택의 곁에서만 맴돌며 볼 수 있었습니다.
 

이삼장군고택서느끼는한옥의멋 7


고택의 왼쪽으로는 사랑채의 옆모습이 있습니다. 이 사랑채에는 다락처럼 높은 마루인
누마루가 있있었는데요. 사진에서 보듯이 다락처럼 높게 솟아 있었습니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안채 날개채의 넓찍한 마루가 이어져 있습니다.

이삼장군고택은 'ㄷ'자형 안채, 'ㄴ'자형의 사랑채, 광으로 이루어져 있고
안채의 왼쪽 뒤에는 사당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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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안채의 뒤뜰로 가는 문이 있었는데요.
문 뒤로 뒤뜰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마당 한 쪽에는 모서리 후원으로 연결되는 협문이 보였고
옆에는 나무를 심어 지형상 마을의 다른 집에서 사랑채 쪽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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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장군 고택은 전반적으로 일반 양반집과는 다른 소박하고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다른 고택에 비해
매우 관리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삼장군고택은 마당이 사방으로 형성되어 있어 각기 독립적인 느낌으로
주위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담 속에 갇혀 고립된 양반의 위엄이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할 것 같은 소박함이 흐르는 고택입니다. 낮은 곡선으로 이루어진 담은
우리 한옥이 내뿜는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렸음은 물론 마당이
아름다워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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