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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百濟斯麻王(백제사마왕)”…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공 확인

부활하는 백제왕국 (1)-공주 송산리고분군

2015.08.06(목) 11:17:1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사마왕은 백제 25대 무령왕의 생전 이름으로 공주 송산리고분군에는 모두 7기의 고분이 있다.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북동쪽으로 1~4호분이 있고, 무령왕릉을 포함해 아래쪽으로 5~6호분이 자리잡고 있다.

▲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사마왕은 백제 25대 무령왕의 생전 이름으로 공주 송산리고분군에는 모두 7기의 고분이 있다.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북동쪽으로 1~4호분이 있고, 무령왕릉을 포함해 아래쪽으로 5~6호분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사마왕삼국시대왕릉중유일하게주인공확인 1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oric Areas)가 지난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등재 지역은 ▲공주(2곳)=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4곳)=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모두 8곳이다. 

이 지역은 세계유산 등재기준 (ⅱ)와 (ⅲ)을 충족했다고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는 밝혔다.

등재기준 (ⅱ)는 ‘특정 기간과 문화권 내 건축이나 기술 발전, 도시 계획 등에 있어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가 될 것, 등재기준 (ⅲ)은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세계유산위는 “백제지역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백제역사지구의 수도 입지 선정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불교 사찰을 통해 백제의 내세관과 종교를, 성곽과 건축물을 통해 백제의 독특한 건축기술을, 고분과 석탑을 통해 백제의 예술미를 찾아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한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의 3건이 한꺼번에 처음으로 등재된 이래 모두 12건에 이르는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에 도정신문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8곳을 찾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971년 7월8일.
전날부터 내린 집중호우로 인부들이 송산리고분군 5호분과 6호분 사이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인부의 삽에 “딱” “딱”하며 돌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1500년전 백제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무령왕릉 발굴의 시작이었다.

발굴단이 무덤입구를 막은 벽돌 두 장을 들어내자 “피식”하며 하얀 연기를 솟아올랐다.

무덤내부로 들어가자 발굴단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바닥에 놓인 2장의 지석이었다. 가로 41.5cm×세로 35cm 장방형 돌 위에는 51자의 해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첫 10글자를 읽는 순간 발굴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사마왕은 백제 25대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인 것으로 밝혀졌다.

무령왕릉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놀라며 주목한 것은 무덤 앞에 놓여 있던 지석(誌石)이었다. 이 2매의 지석은 삼국시대의 여러 왕릉급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된 것이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왕의 지석에는 묘지와 방위도가 새겨져 있었다.

왕비의 지석에는 묘지와 매지문(買地文)이 새겨져 있다. 지석에는 왕과 왕비가 세상을 뜬 날짜와 장례 절차에 관한 것이 적혀 있었다.

왕비의 지석에 쓰여진 매지권은 땅의 신들에게 묘를 조성할 토지를 사들인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왕릉은 묘실 전체를 벽돌로 쌓은 무덤으로 입구 통로에 해당하는 연도(羨道), 시신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으로 나뉘어져 있다. 왕릉에서는 왕의 금제관식, 목걸이, 귀걸이, 은제 과대, 왕비의 금제관식,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 모두 108종 4600여점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특히 지석위에는 중국 양나라의 화폐인 오수전이 놓여 있어 중국과의 대외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곳이 바로 송산리고분군이다.
백제의 22대 문주왕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서울)이 함락되자, 웅진(공주)으로의 천도를 단행한다.

이후 26대 왕인 성왕이 538년에 다시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들은 바로 웅진 도읍기에 재위했던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들이다.

현재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130m의 나지막한 송산(宋山)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송산리 고분군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이 고분군에서는 7기의 고분이 있다.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북동쪽으로 1~4호분이 있고, 아래쪽으로 무령왕릉을 포함해 5호분과 6호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도 웅진시기 백제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했었는데,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웅진백제 왕릉원임이 확실해졌다.

/김태신ktx@korea.kr
 

백제사마왕삼국시대왕릉중유일하게주인공확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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