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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추사 김정희가 심은 느낌 있는 나무

이야기가 있는 충남의 나무⑤ : 예산 용궁리 백송

2013.11.25(월) 00:56:25 | 탈론 (이메일주소:malgmywoo@naver.com
               	malgmywoo@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주중에는 내내 맑다가 주말이 되니 다시 흐리다. 사진빨이 좋을까 모르겠다. 오늘 소개할 나무는 예산 용궁리 백송이다.

사실 나는 이 백송을 보고 그 조그만 규모에 엄청 실망했다. 그동안 보아 온 나무들은 크기는 최고 높이가 30m 이상, 둘레가 10m 이상이었는데, 높이가 겨우 14.5m이고 가슴높이 둘레가 4.77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송에 대한 얘기를 듣다보니 왜소한 그 규모조차도 놀라운 것이란 걸 알았다.

용궁리 백송의 모습. 멀리서 바라보니 나무가 왜소해 보인다.

▲ 용궁리 백송의 모습. 멀리서 바라보니 나무가 왜소해 보인다.


백송(白松)은 소나무과에 속하는 침엽수이다. 이름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껍질이 흰색이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백골송(白骨松), 반룡송(蟠龍松)이라고도 하며 북한에서 사람들은 흰소나무라 부른다. 원래 백송은 중국 원산으로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중서북부에만 자라는 특별한 나무다. 옛적부터 궁궐이나 사원 및 묘지의 둘레나무로 흔히 심었다고 한다.
 
흔히 귀화식물이 토종식물을 위협하지만 백송은 거꾸로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크지도 않고 번식도 잘 안된다. 10년에 겨우 50cm밖에 자라지 못한다고 하며 옮겨심기도 무척 까다롭다. 그래서 용궁리 백송의 규모는 저렇게 조그만해 보여도 사실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자세히 나무를 보았다. 사실 이전에 한 번도 못 봤던 나무라서 그런지 새롭게 보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느낌있다'라고나 할까.

다시 돌아보니 고귀한 자태에 품격있어 보인다.

▲ 다시 돌아보니 고귀한 자태에 품격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기 어려운 나무라니 어쨌든 위태롭다. 나무 밑둥을 보니 이미 두 줄기가 죽어서 무슨 굵은 시멘트 기둥을 박아놓은 것 같이 보인다. 바람에 쓰러지지 말라고 쇠줄로 단단하게 묶어 놓기도 했다. 잘 커주면 좋겠다.

이미 말라죽은 나무 줄기가 시멘트 기둥 박아놓은 듯 보인다.

▲ 이미 말라죽은 나무 줄기가 시멘트 기둥 박아놓은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웬만한 굵기의 백송은 특별히 보호된다. 천연기념물 1호부터 10호 중에 6점이 백송인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재 남한에 5그루, 북한은 개성에 1그루의 백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중 예산 용궁리 한 그루를 제외하면, 자라는 곳은 모두 서울 경기 지방이다. 옛날 중국왕래를 할 수 있는 고위관리가 주로 서울 경기에 살았던 까닭이다. 현재 국내에 살아있는 오래된 백송들 역시 중국을 오가던 사신이나 양반가의 선비들이 한 그루씩 얻어와 심어 키운 나무들이다.

나무 밑둥을 살펴보니, 생각외로 매우 굵다. 200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견딘 것은 아닌가보다.

▲ 나무 밑둥을 살펴보니 장난아니게 굵다. 200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견딘 것은 아닌가보다.

 
오래된 백송은 태풍에 쓰러지기도 하고 복토작업 후 말라죽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백송나무였던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은 1990년 돌풍에 죽었고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 백송과 제6호였던 원효로 백송, 제7호였던 회현동의 백송도 말라 죽었다. 모두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 서울에는 현재 두 그루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8호는 종로구 재동에, 제9호는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 경기도에는 고양에 송포 백송(60호)이 있고 이천에 신대리 백송(253호)이 명맥을 잇고 있다.
 
용궁리 백송은 추사 김정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전해지는 얘기는 다음과 같다. 1809년(순조 9년) 추사가 24살이 되던 해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북경을 가게 되자 낼름 수행원이 되어 따라간다. 2개월 남짓 북경에 머무는 동안 백송을 흔히 만날 수 있었음을 기뻐했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씨앗을 얻어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씨앗을 붓뚜껑에 넣어가지고 왔다고도 하고(문익점 흉내를 냈나?ㅋㅋ), 묘목을 얻어왔다고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정희가 심은 게 중요한 거니까.
 
1810년 3월 중순 충남 예산의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영의정을 지낸 고조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가져온 백송을 묘소 앞 소나무 옆에 정성껏 심었다. 그래서 수령이 딱 200년이고 그 백송은 바로 천연기념물 106호로 오늘의 주인공 용궁리 백송이다.

추사 김정희는 중국에서 가져온 백송을 고조할아버지 묘소 앞에 심었다.

▲ 추사 김정희는 중국에서 가져온 백송을 고조할아버지 묘소 앞에 심었다. 
 

백송 옆에 소나무 한그루가 멋있게 조화롭게 서있다.

▲ 백송 옆에 소나무 한그루가 멋있게 조화롭게 서있다.


추사는 어렸을 적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의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영조의 둘째 사위였던 김한신의 집은 서울 통의동에 있었는데, 엄청나게 큰 저택이었다고 한다. 이곳 정원 한 구석에는 숙종 때 심어진 백송(천연기념물 4호)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중국에 갔다가 백송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뉴스를 보니 문화재청이 1977년부터 관리해온 백송 종자를 채종해 발아시켜 후계목으로 증식시키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말라죽거나 태풍에 쓰러지더라도 대를 잇겠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백송이 있는 곳에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면 추사고택이 있다. 고택을 둘러보면서, 김정희 선생의 삶을 돌아보는 역사공부도 하면 좋겠다.
 
 

보기 힘든 나무이니만큼 오래오래 잘 살면 좋겠다.

▲ 보기 힘든 나무이니만큼 오래오래 잘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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