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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를 찾아서

한달전 8월29일이 바로 경술국치일이었습니다

2013.09.24(화) 16:08:48 | 김진순 (이메일주소:dhjsdk44@hanmail.net
               	dhjsdk4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님의 침묵   / 만해 한용운(萬海 - 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중략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 달 전쯤이었던 8월29일. 이 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 직전 8.15는 광복절이기에 잘 알겠지만요.

갑자기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꺼내 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8월29일은 우리 대한민국 5천년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어두웠던 시기인 일제 강점기의 시작, 즉 경술국치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한일합방이라 불렀던 바로 그 날입니다.

경술국치일 직후에 독립운동가였고 애국지사이자 불교시인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선생의 생가지를 방문했었는데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홍성에는 만해 한용운선생 말고도 백야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가 김복한 선생, 최영장군과 사육신 성삼문선생 등 애국지사와 위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번에 특별히 한용운 선생 생가지를 방문한 까닭은 앞서 밝혔듯이 바로 며칠전이 우리가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될 경술국치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는 크게 당신의 생가를 복원한 초가집, 그리고 유품 등을 전시한 기념관, 영정을 모신 사당, 충절의 뜻을 모아 단장한 민족시비 공원 이렇게 4곳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먼저 선생의 생애를 간략히 짚어 보겠습니다.

한용운(1879~1944)선생께서는 1879년(고종16년)에 우리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불교시인이기도 했던 선생의 본명은 정옥으로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입니다.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피신하여 설악산과 백담사를 거치면서 승려가 되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참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였고, 1919년 3.1독립운동을 이끈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하였습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던중 1944년 5월 9일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선생은 삶을 마칠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청년 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워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기에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생가 앞 안내문

▲ 생가 앞 안내문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

▲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


선생의 생가 주차장에 세워진 안내문 앞에서 한 여성 방문객이 진지한 자세로 안내문을 읽고 있네요. 학생들도 많이 방문을 했는데 기념관에 들러 사진도 찍고 뭔가 열심히 적기도 합니다.
 

기념관

▲ 기념관(체험관)
 

기념관 옆 선생의 흉상

▲ 기념관 옆 선생의 흉상
 

액자

▲ 선생의 친필 액자
 

님의 침묵 발표 당시 만들어진 책 원본

▲ 님의 침묵을 소개한 책들
 

시화

▲ 선생의 시를 그림으로 함께 만든 시화
 

님의

▲ 만해에 대한 근현대의 평전
 

1950년 출판사 한성도서에서 발간한 님의 침묵 책

▲ 1950년 출판사 한성도서에서 발간한 님의 침묵 책
 

책

▲ 선생이 인수하여 발간한 불교지
 

이

▲ 선생의 친필 '마저절위'


기념관 건물입니다. 그리고 흉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이름은 체험관이라고 되어 있지만 체험보다는 전시품 기념관에 가깝습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선생이 기거하던 심우장 기와집 모형과 님의 침묵을 출간한 책, 선생이 직접 인수해서 발간한 잡지 유심 원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그린 그림에 님의 침묵을 써 넣은 시화 액자와 선생이 정진이 마음을 스스로 다잡기 위해 쓴 한문 친필 서각까지 고루 보관돼 있습니다.
 

선생이 사시다가 타계한 기와집인 서울 심우장 모형

▲ 선생이 사시다가 타계한 기와집인 서울 심우장 모형
 

글을 읽는 선생의 모습

▲ 글을 읽는 선생의 모습


선생이 1879년부터 타계하신 1944년까지 기거했던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집 모형입니다.

사진에서는 잘 알수 없지만 이 집은 북향입니다. 모든 집이 다 남향 또는 남서향인데 선생은 조선총독부를 보기 싫다고 하여 아예 집을 북향으로 지으셨다고 하며 그렇게 평생을 총독부와 등진 채 사시다가 떠나셨습니다.

현재 이 심우장은 서울시 기념물 7호로 지정돼 있다고 합니다.
 

선생의 생가 초가집

▲ 선생의 생가 초가집
 

'전대법륜'

▲ 생가에 걸려있는 선생의 친필 '전대법륜'
 

생가의 님의 침묵 액자

▲ 생가의 님의 침묵 액자
 

생가 내부

▲ 생가 내부
 

생가 부엌

▲ 생가 부엌


생가 초가집은 그다지 크지 않고 작게 복원돼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울타리와 사립문이 정겹게 둘러쳐져 있고 생가에는 선생의 친필 붓글씨와 어느 서예가가 써서 기증한 님의 침묵 원문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의 벽체와 한지로 만든 방문, 그리고 무쇠 솥이 걸려 있는 전통의 아궁이와 부엌까지 모두 정겹고 선생의 체취가 느껴지는듯 합니다.
 

사당 '만해사'앞 외삼문

▲ 사당 '만해사'앞 외삼문
 

외삼문 옆 뜰에 핀 무궁화

▲ 옆 뜰에 핀 무궁화에서 바라본 외삼문
 

멀리서 본 만해사 사당

▲ 멀리서 본 만해사 사당
 

가까이서 만난 만해사

▲ 가까이서 만난 만해사
 

사당 안의 선생 영정

▲ 사당 안의 선생 영정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이름은 만해사.

만해사 앞에는 외삼문이 있고 사당 안에는 일제에 항거한 결연한 표정의 선생의 영정 초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정신 못차리고 있는 일본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큰 꾸지람을 하는 듯한 눈매입니다.
 

생가 뒤에 마련된 민족시비 공원

▲ 생가 뒤에 마련된 민족시비 공원
 

공원의 시비

▲ 공원의 시비이자 선생의 어록비
 

이육사의 사비

▲ 이육사의 시비
 

예쁘게 핀 야생화와 시비

▲ 예쁘게 핀 야생화와 시비


생가와 전시관, 사당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볼수 있는 곳이 생가 뒤편의 민족시비 공원입니다. 많은 민족적 항일 애국 시와 문학작품을 비석으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전부다 소개해 드리기가 어려워 몇가지만 올립니다.
시비가 세워져 있는 뒷산을 올라가 이 시비를 다 둘러보며 내려오는데도 1시간은 넘게 걸리더군요.

기미독립선언 33인중 한분이셨고,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애국 청년운동과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우다가 66세를 일기로 떠나신 당신.

우리나라 근대사의 거봉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한용운 선생의 정신을 오늘 다시한번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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