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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4대에 걸친애국정신, 수당기념관과 고택

2013.04.01(월) 16:22:30 | 잎싹 (이메일주소:kji206@naver.com
               	kji206@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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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기념관은 "사가살 불가욕 (士可殺不可辱)으로 수당이 실천한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수당 이남규, 이충구, 이승복, 이장원 4대에 걸친 호국활동을 소개하며 수당가의 애국정신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수당가에 전해져 오는 선대유물과 고문서 등 수당의 정신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 세대를 걸친 애국, 애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며 교육과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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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의 뜻을 담고 있는 사가살 불가욕 (士可殺不可辱)이 적혀 있어 수당이 실천한 고귀한 정신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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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은 중심에서 양쪽으로 나눠서 전시가 되어 있다. 수당흉상과 더불어 그 옆으로 연보가 있어 자세히 수당 선생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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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선생 흉상

수당 이남규선생은 어떤분일까?  1855년 서울 미동에서 태어나 1875년 향시와 사마시 양과에 합격하였다.  1882년 정시 춘당대시에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899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6년 홍주의병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1907년 아들 이충구와 함께 아산 평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일제에 맞서 그에 대한 방비와 대비책을 진언, 규탄하고 끊임없이 맞서 싸우다 죽는 날까지 굴복하지 않았으며 특히 4대에 걸친 수당가의 애국정신을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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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선생의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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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품중에서 우측에 보이는 붉은 장지에 적힌 이남규홍패는 조선시대 문과와 병과 양과에 합격자에게 내리는 증서이다. 1882년에는 정시문과, 별시문과, 증광문과 등 모두 3차례의 문과시험이 있었는데 수당선생은 정시문과에서 병과2등으로 합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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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쳐로 수당 이남규선생의 행적을 한눈에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다. 사랑방 평원정에 앉아서 일제의 전통문화 훼손정책의 하나인 단발령에도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르지 못하겠다" 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침탈이 심해지자 홍주의병을 적극 지원하고 의병을 모의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1907년 선생이 거처하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압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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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선생은 " 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수은 없다" ? 사가살 불가욕 (士可殺不可辱)이라 하시며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충남 아시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러러 일본군의 마지막 회유에 "죽이려면 줄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 하며 굴하지 않자 결굴 칼로 선생을 피살 하였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맏아들 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김은길도 일본군의 칼에 맞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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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손자 이승복은 만주, 상해을 오가며 독립운동를 펼쳤으며 증손자 이장원은 6.25때 해변 원산전투중에 전사하여 호국정신을 실천하였다. 이들은 현재 현충원에 3대가 묻혀있으며 4대가 나라를 위해 싸운 일은 유래를 찾아 보기 어려운 일로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에서 수당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시장에는 1900년 고종이 함경북도 안렴사 이남규에게 남긴 밀지, 이 건창이 지은 수당기, 이 남규를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면한다는 고종의 칙명(교지) 와 이남규의 벼루와 벼루집, 이남규 호패, 이남규 필통, 결재도장(수결), 이남규가 사용하던 호수와 호수통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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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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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예산의 실학자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이바지 했던 수많은 예산출신의 애국지사의 본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산이씨인 수당가는 학문과 문학을 가학의 전통에서 찾아 구하여 계승하고 청빈함을 목숨과도 같이 여겼던 선비정신을 읽을 수 있다. 평소 수당선생의 의지와 용기를 알 수 있는 어록인 "우리 백만 의병이 내 머릿속에 있다" 라는 수당 어록비는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 앞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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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옆으로 수당선생 고택은 충남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당고택은 당시 손자며느리였던 이구의 부인은 보령에 살았는데 근처에 있는 조상의 묘소를 오가다 이곳에 1637년(인조15년)에 짓게 되었다. 여자가 그당시에 집을 짓는다는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도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다 지었다. 남향집으로 "ㅡ"형으로 사랑채와 "튼 ㅁ"형의 안채가 있으며 모두 5량의 굴도리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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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평원정

별장이자 사랑채인 "평원정 (平遠亭)"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이곳에서 수당은 일제의 만행에 격분한 상소를 올렸으며 홍주 이병장 민종식을 숨겨주기도 했던 의병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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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바로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고 비켜서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사람이 들어올때 채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것 같다. 안채의 좌측 끝은 맞배지붕이며 대청 전만에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겹처마을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여자가 만들어서 그런지 단아하고 절제된듯 하지만 쓰임새는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이곳에는 현재 후손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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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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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사랑채앞에는 고목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고사된듯한 나무한그루 속에서 다시 새순이 돋아 꽃을 보여주고 있는 산수유한그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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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선생 고택 100여미터 옆에는 예산 상항리 석불(유형문화재 제69호)이 있다. 석불을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돌이 쌓아져 있는데 원래 저수지 안쪽에 있다가 이곳을 옮겨졌다. 이마 위에 마름모꼴과 머리띠 같은 모양이 새겨져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눈은 감았으며 코와 목이 낮고 짧으나 수행의 단계를 표현한 삼도(三道)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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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길 고택 입구 왼쪽에는 효부 성균 진사 이상빈처 신씨지문 (孝婦 成均進士 李尙賓妻 申氏之門)이라고 적힌 효부신시지문이 있다. 수당기념관과 수당선생고택이 있는 이곳은 방산지 아래 무척 고즈넉한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세대에 걸친 수당가의 애국심과 효심을 가슴깊이 새기는 의미있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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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기념관/수당선생고택
(041-331-4401)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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