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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쌀을 두 번 죽이지 말라

<서평> 몸살, 한승오 농사일기

2009.08.17(월)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쌀을두번죽이지말라 1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이따금 몸살이 나기 마련이다. 몸살이 오면 팔다리가 쑤시고 나른하며 기운이 없고 오한까지 난다. 이러한 때의 묘책으론 우선 푹 쉬면서 고단했던 몸을 다독여주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몸에 좋은 보양식을 섭취하며 일상에서의 스트레스까지를 의도적으로라도 잊는 게 상책이다.

헌데 몸살은 과연 사람만이 겪는 현상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논과 밭 등의 땅은 이유를 묻지 않고 씨앗을 받아들여 모정(母情)의 지고지순과 사랑으로 정성껏 키워준다.

하지만 땅도 사람처럼 몸살을 앓는다. 이는 어떤 모종이든 땅에 옮겨 심으면 그 땅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기 마련인 때문이다. 즉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다 흙으로 나가 혼자의 힘으로 자리를 잡으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고로 모를 논에 내면 처음 며칠 동안 모의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시들시들해지는데 이를 보고 모가 ‘몸살을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린 모두 만날 쌀로 지은 밥을 먹는 민족이다. 그런데 밥은 과연 어떠한 과정으로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것일까?
우선 쌀은 쌀의 한자적 의미인 미(米)처럼 쌀농사를 짓는 농부의 손길이 자그마치 여든 여덟 번(88)이나 가야만 비로소 벼에서 쌀로 거듭 날 수 있음이다.

헌데 논에서 잘 자랐다고 하여 곧바로 벼가 쌀이 되는 건 아니다. 쌀로 거듭나려는 벼는 막 탯줄을 끊은 어린아이인 양 지독한 낯섦을 마주하며 아울러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쌀이 될 수 없다.

논에서 막 나온 벼는 딱딱한 아스팔트길이나 땅 따위에서 구르며 그 몸을 더욱 단단하게 조련하여야만 한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한 햇살은 벼에게도 무척이나 따갑고 아프다.
무시로 찾아오는 바람은 또한 벼를 두드리는데 밤이 되어서야 달빛 속에서 심신을 그나마 쉴 수 있다.

새벽의 차가운 서리 또한 불청객으로 다가와 벼를 마구 단련케 함은 물론이다. 이처럼 가혹한 조건을 모두 견뎌낸 벼야만이 비로소 몸속에 있던 물을 죄 빼내고 하얗고 투명한 햅쌀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네 인간에 비유하자면 생로병사의 수순처럼 그렇게 간난신고(艱難辛苦)의 험산준령을 거쳐야만 겨우 인생을 알 만한 그런 위치의 범주라 하겠다.

<몸살 - 한승오 농사일기>(강 刊)을 읽자면 쌀의 그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음에 우리가 그나마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커다란 교훈의 항구에 정박하게 된다.
쌀의 소비가 갈수록 감소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딘 연후에야 겨우 우리의 식탁에 오른 신토불이 쌀을 외면하는 일은 그렇다면 쌀을 두 번 죽이는 행위가 아닐지.

우린 쌀에서 배워야 한다. 인간의 배를 채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벼들은 그 지독한 나날을 풍찬노숙도 모자라 지독한 고생까지를 마다않았음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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